“원금 까먹고 잘했다는 게 말 되나 … 자문형 랩은 한국형 헤지펀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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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호 26면

이기헌 하이자산운용 상무

경쟁은 진화를 부른다. ‘자문형 랩’이 투자자들의 인기를 끌면서 진화하고 있다. 특정 자문사와 연계한 단순한 형태에서 여러 자문사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상품도 나왔다. 하이투자증권이 지난달 선보인 랩은 한발 더 나아가 ‘수익률 리그제를 통한 자문사 경쟁 선발’을 앞세운다. 자문사들이 수익률 경쟁을 벌이고, 투자자들은 그 성과를 보고 자문사를 선택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상품을 개발한 이 회사 이기헌 고객자산운용센터장을 만나 자문형 랩 시장과 신상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대우증권 고객자산운용부 재직 시절 국내 랩어카운트 사업을 활성화시킨 주역으로 평가 받는다. 2007년 금융감독원이 선정하는 우수 금융신상품 개발자로 꼽히기도 했다. 지난해 말 하이투자증권이 고객자산운용센터를 신설하면서 그를 수장으로 영입했다.(※는 편집자 주)
 
-자문형 랩으로 돈이 몰린다.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펀드에 두 번 데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말 ‘바이코리아’ 열풍을 떠올려 보라(※99년 당시 펀드를 이끌던 이익치 현대증권 사장은 코스피 지수가 2005년 6000포인트를 돌파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펀드에 돈을 몰아넣었지만 이후 정보기술(IT)주 버블이 꺼지고 9·11테러까지 겹치면서 투자금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다시는 펀드 투자 안 한다’고들 했다. 그런 이들이 2007년 열풍에 펀드 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펀드가 반 토막 났다.”

‘수익률 리그제’ 자문형 랩 만든 이기헌 하이자산운용 상무

-시장 하락으로 인한 손실 가능성은 펀드나 랩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펀드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펀드를 운용하는 매니저의 목표와 펀드에 투자하는 고객들의 목표가 다르다는 점이다. 매니저는 벤치마크보다 잘하면 된다. 펀드 수익률이 -20%가 나와도 시장이 30% 떨어졌으면 10%포인트 잘한 거라고 자랑한다. 그런데 고객 입장에서 보자. 원금을 20% 까먹었는데 잘한 거냐. 아니다. 항상 수익을 원하는 고객에게 맞는 상품이 랩이다. 랩은 시장이 나쁘면, 극단적으로 말해 주식을 하나도 들고 가지 않아도 된다. 시장 상황에 따라 자산 배분까지 랩 운용자가 알아서 한다. 그리고 랩은 내 계좌가 따로 관리된다. 어디에 투자해서 얼마의 수익이 나는지 홈트레이딩시스템(HTS)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투자한 종목이 마음에 안 들면 뺄 수도 있고 넣고 싶은 종목을 넣을 수도 있고. 맞춤 투자가 가능하다.”

-그간에도 일임형 랩이 있었다. 그런데 왜 투자자문사에서 포트폴리오를 받는 자문형 랩이 뜨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시장이 폭락했을 때 모 증권사가 팔던 자문형 랩이 플러스 수익을 기록하면서 자산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다. 최근 1~2년 사이에 주요 운용사의 주식운용본부장(CIO)나 팀장들이 투자자문사로 옮겨갔다. 실력 있는 매니저가 자문사에 포진한 데다 지난해 시장이 특정 테마 종목을 중심으로 크게 올랐다. 이들 종목에 집중 투자할 수 있는 자문형 랩이 펀드에 비해 수익률이 2배, 많게는 3배까지 앞섰다. 돈은 수익률을 따라서 움직인다.”

-적은 종목에 투자해서 높은 수익이 가능했지만 반대로 시장이 하락하면 더 위험하지 않겠나.
“요즘 그런 이유를 들어 자문형 랩을 비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실제로 소수 종목 집중 투자가 정말 위험한지 데이터로 증명해 봤나. (※수익률을 시뮬레이션한 자료를 앞에 내밀며) 하도 말이 많아 내가 직접 해봤다. 시장이 오를 때와 떨어질 때를 나눠 시가총액 상위 5개 종목과 10개 종목에 똑같이 나눠 투자한 뒤 성과를 비교했다. 예를 들어 2006년 6월 13일(1204포인트)부터 2007년 11월 1일(2063포인트)까지 코스피 지수가 71% 오르는 동안 시총 상위 5개 종목에 나눠 투자할 경우 수익률은 335%였다. 10개 종목 투자는 388%였고. 지수 수익률의 5배 수준이다. 반대로 코스피 지수가 50% 떨어졌던 2008년 5~10월을 보자. 5개 종목에 투자할 경우엔 53.6%, 10개 종목에 투자할 경우엔 48.3% 떨어졌다. 코스피 지수 하락률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랩이 특별히 위험하지 않으면서 투자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훨씬 크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몰빵 투자’ ‘자문사 7공주’ 이런 얘기까지 나온다. 운용업계나 감독당국은 ‘쏠림 현상’으로 투자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우려한다(※14일 금융감독원은 97개 투자자문사 전체에 대해 최근 3년간 거래 내역과 모델 포트폴리오 등을 바탕으로 불공정 거래 행위가 없었는지 조사에 나섰다).

“감독당국이 우려하는 게 시장 하락 시 자문형 랩 수익률이 급락해 민원이 몰리는 경우다. 최근 자문사가 투자하는 종목들 주가가 많이 오르긴 했다. 그런데 ‘자문사 7공주’라는 종목이 LG화학·하이닉스·기아자동차·삼성전기·삼성SDI·삼성테크윈·제일모직 등 시가총액 50위 안에 드는 것들이다. 6월 말 기준으로 자문형 랩 잔액이 2조2000억원이다. 이 돈으로 시총 20조가 넘는 종목(※LG화학)을 흔들 수 있겠나. 그리고 자문사들도 이들 종목을 전체 자산의 상당부분 들고 가기 때문에 단타 매매로 함부로 정리하기 어렵다. 2007년 펀드로 돈 몰릴 때는 미래에셋이 특정 종목의 주가를 밀어올린다고 하지 않았나. 자문형 랩은 새로운 투자수단이다. 절대수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랩은 헤지펀드와 닮았다. 외국에서는 절대수익에 대한 투자자의 욕구를 헤지펀드가 해결해 주지만 지금까지 우리 시장에는 그런 수단이 없었다. 그런 역할을 자문형 랩이 맡은 거다.”

-랩은 계좌별로 관리가 된다. 그 때문에 특정 계좌의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다른 계좌를 희생양으로 삼는 불공정 매매 행위가 나타날 수 있는 것 아니냐.
“그건 자문형 랩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운용을 투명하게 하면 된다. 펀드에서는 그런 일 없었나. 특정 펀드 수익을 높이려고 부실자산을 다른 펀드로 넘겼다. 이건 자문형 랩을 탓할 게 아니라 감독당국이 감독을 철저히 하면 된다.”

-신상품 얘기를 해 보자. ‘수익률 리그제’를 도입했다고 하는데, 자세히 설명해 달라.
“그간엔 증권사가 크고 유명한 투자자문사를 골라서 고객들과 랩 형태로 연결해 줬다. 실력이 있어도 자본력이 부족하고 신생이라 이름이 없으면 그 자문사는 아예 상품을 팔기 어려웠다. 자문사도 ‘부익부 빈익빈’이다. 우리 랩은 그런 이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거다. 랩 계좌에 일단 자기네 돈 5억원을 넣고 운용하면서 수익률이 나오면 그 수익률을 보고 하이투자증권 지점 직원들이 고객들에게 신생 자문사 랩이라도 투자를 권유한다. 신생 자문사로서는 물건을 팔 수 있는 유통망이 생기는 거다. 봐라. 유명한 자문사는 보기 어렵다(※현재 수익률 리그 경쟁에 들어온 자문사는 로터스·리드스톤·맥·슈프림·웅진루카스·유리치·이룸·LIG투자자문, 뱅커스앤트레이더스, 드림자산운용 등이다). 처음에는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것에 반발하다가도 취지를 설명하면 공감한다. 우리는 또 일정 수익을 넘어서면 성과보수는 자문사와 반반씩 나눠 가진다. 우리 시스템은 금융벤처를 가능하게 해 준다. 그래서 상품 개발 자료도 다른 증권사에 다 넘겼다. 우리만 잘살자는 게 아니라 파이를 키우자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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