鬼티 나는 여자 (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7면

한 배우에게 '○○○전문'이란 딱지가 붙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특히 앞으로 실력을 쑥쑥 키워가야 할 어린 배우에게 '○○○표' 배우란 평가가 고정된다면 결코 환영할 일이 못된다. 그러나 예외 없는 법칙이 없다고 했던가. 일단 하지원(23)에겐 그렇다. 하지원은 최근 한 인터넷 사이트의 인기도 조사에서 공포영화의 귀신역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 배우로 꼽혔다. 2000년 여름 한국 공포영화로는 유일하게 히트한 '가위'에 이어 올 여름 찾아올 공포 스릴러 '폰'(26일 개봉)의 주연으로 낙점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대종상 신인 여우상을 안겨주었던 영화 데뷔작 '진실게임'도 스릴러였으니, 충무로의 '호러 퀸'으로 불러도 큰 무리는 없겠다. '동감'을 포함해 역대 출연작 네 편 가운데 세 편이 공포 계열의 영화인 것. 특히 그는 지난 11일 개막한 제 6회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에서 페스티벌 레이디로 선정됐다. 강수연·진희경·추상미·배두나·장진영을 잇는 스타급 연기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길어야 3년 남짓한 스크린 생활을 놓고 볼 때 나름의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한 게 분명해 보인다.

"솔직히 공포영화는 즐겨 보지 않아요. 겁이 무척 많거든요. '가위'도 저 혼자 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엉뚱한 대답이 튀어나온다. 스스로 자기 말이 이상하게 들렸는지 금방 두 손으로 입을 가린다. 길게 늘어뜨린 생머리, 오똑하게 솟은 코, 환하게 벌어지는 입 등 아직도 소녀티를 벗지 못한 것 같은 천진함이 물씬 풍긴다.

"공포영화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요"라고 농삼아 던지니 그게 오히려 칭찬으로 들렸나 보다. "그죠, 정말 그렇죠"라며 얼굴을 환하게 밝힌다. "그래도 공포영화를 찍을 때는 너무 즐거워요.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감정을 잡고, 그 느낌으로 객석을 놀라게 만든다는 것, 그건 정말 귀중한 경험이거든요." '가위'에서 귀신으로 등장해 서늘한 눈빛으로 소름을 돋게 했던 그의 연기가 그냥 나온 게 아닌 것 같다.

하 지원이 '가위'의 안병기 감독과 2년 만에 다시 뭉친 '폰'은 아이디어가 독특하다. 현대인의 필수품인 휴대전화를 매개로 한 스릴러다. 하지원은 이번 영화에서 휴대전화로 정체불명의 메시지를 받고 극한의 공포에 시달리다가 잇따라 죽어가는 사람을 추적하는 잡지사 기자로 출연한다. 그는 지금까지 출연했던 작품 가운데 '최고'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가장 힘든 영화였습니다. 예전엔 조금 서툴러도 신인이니까 용서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이젠 배우로서 승부해야 하거든요. 특히 이전 작품과 달리 이번 영화에선 제가 공포를 경험하는 입장입니다. '가위'에선 귀신으로 나와 눈에 힘을 주면 됐지만 이번엔 정반대 역할이죠. 공포의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돌아섰다고나 할까요."

하지원은 이번에 처음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는 습관이 붙었다고 했다. 겁에 질린 자기 얼굴이 과연 어떤 모습일까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절대 눈을 깜박이지 말 것, 몸의 이동을 최소화할 것, 대사는 천천히, 그러면서도 힘있게 할 것 등을 수없이 연습했다고 말했다. 일례로 공포에 빠진 배우가 눈을 깜박이면 관객도 눈을 감게 되고, 결국 영화의 긴장감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연기를 못하는 배우가 행동을 크게 한다는 감독님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눈빛 하나로도 분위기를 표현하고, 객석도 장악하는 그런 노하우를 익혔습니다. 촬영장에선 일부러 웃지도 않았어요. 영화 속 인물에 몰입하려는 뜻이었죠."

그가 이번에 참고한 영화는 조디 포스터 주연의 '양들의 침묵'과 니콜 키드먼 주연의 '디 아더스'. '폰'도 피가 난무하고 사지가 뚝뚝 떨어져 나가는 엽기적 공포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관객의 마음을 점점 조여가는 심리적 공포가 돋보이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대처해가는 캐릭터도 두 작품과 유사하다고 강조했다.

잠 시 숨을 돌렸다. 영화의 소재가 된 휴대전화는 자주 사용하느냐고 물었다. 그가 "아니요, 저 캔디예요"라고 답했다. 외로운 소녀 캔디처럼 걸 전화도, 걸려오는 전화도 별로 없다는 것. "지금은 연기에만 정진할래요. 언젠가 저도 안성기 선배처럼 국민배우란 말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TV도 드라마에만 열중하고, 오락 프로그램은 삼가고 있어요. 연예프로 진행, 라디오 DJ 등의 섭외도 있었지만 모두 사양했어요."

그가 '국민배우'란 표현에 스스로도 놀랐는지 크게 웃었다. 그런 자신감이 예쁜 배우 하지원이 아닌 연기자 하지원으로 승화되는 저력으로 작용할지 모를 일이다.

박정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