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당정합의 뒤집는데 기업은 누굴 믿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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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정부-여당 간 합의가 여당 의원의 반대로 국회에서 처리가 무산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했다. 기업들이 과거 저지른 분식회계를 집단소송 대상에서 2년간 유예하자는 당정합의가 법사위 소위에서 뒤집어진 것이다. 내년부터 자산 2조원 이상 상장기업들은 과거의 어쩔 수 없는 관행에 발목이 잡혀 줄소송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번 사태는 무엇보다 정부 정책의 예측가능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 정책위란 공식 창구가 합의한 법안을 몇몇 의원이 생각이 다르다고 뒤집는다면 정부와 여당 간의 공조란 있을 수 없게 됐다. 정부는 국회의 어느 쪽과도 협의를 통해 책임 있게 정책을 추진할 수 없게 됐다.

기업의 입장에서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마당에 이제는 줄소송 사태에 대응하느라 어떻게 기업 본연의 일을 해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2년이라는 유예를 믿고 있었는데 이것마저 이런 식으로 거부되는 마당에 기업으로서 기업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물론 기업들도 과거를 사과하고 불신 해소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만 이게 과거에는 관행이었으며, 급작스러운 제도 변화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므로 여유를 달라는 것이지 '없던 일'로 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당정이 유예를 합의한 이유가 이 법을 밀어붙일 경우 부작용이 너무 크므로 부총리까지 나서서 설득했고 여당 지도부도 동의한 것이다.

대통령은 새해에는 '경제에 올인'하겠다고 말하고 있고 정부도 내년도 경제 운용을 하며 재정 조기집행 등 경제 살리기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청사진이나 말보다는 신뢰가 더 중요하다. 지금 투자가 안 되고 소비가 안 되는 이유가 장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같은 일이 생기면 아무리 좋은 경제 약을 처방해도 백약이 무효다. 정부 정책의 예측가능성을 높이고, 기업인의 불안감을 덜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년 초 임시국회를 열어 유예안을 처리해야 한다. 그래야 기업들이 일을 할 수 있고, 경제를 살릴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