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와 경험 폭발시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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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나는 야구를 좋아한다. 베트남전 시절에는 미군 팀을 상대로 하는 시합에서 한국군 선수로 뛰기도 했다. 20대 후반에는 만화가들 야구 팀의 부정 선수(나는 만화가가 아니었다) 노릇도 했다. 만화가 박수동·이홍우·김박·허어(권성국) 등이 주전들이었다.30대에는, 주전은 아니었어도 아마추어 야구 팀 '휘모리'에 소속돼 있었다. 북 디자이너 정병규 형은 창단 멤버 중의 한 분이다. 내가 야구를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야구에 대한 정보를 조금 가지고 있고 실제로 내가, 형편없는 실력으로나마, 선수 노릇도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물론 축구 구경하는 재미도 누리지 못한다.국가대표 선수들을 나는 얼마나 짜증스러워 했던가? 군대 시절, 나는 소대 대표 선수로 전반전을 뛴 적이 있다. 무수한 헛발길질 끝에 공은 딱 한번 차 보았다. 후반전에 교체된 것은 물론이다. 내가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은 축구에 대한 정보도 가지지 못한 데다 하다못해 조기축구 팀의 선수 노릇을 할 실력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무수한 청탁이 있었지만 나는 월드컵 기간 중 신문에 글 한 줄 쓰지 않았다.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에 관한 한 내게는 긴 준비 기간이 있었고, 풍부한 경험이 있다. 약간의 실적도 올린 것으로 세간에는 알려져 있다. 소설 쓰는 일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게는 긴 준비 기간이 있었고, 그동안 쓴 소설도 여러 권 된다. 약간의 실적이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문학상을 준 분들에게는 결례가 되겠다.고대 신화를 풀어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전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나는 오래 준비했고,많이 썼다. 많은 사람들이 내 책을 읽어주는 덕분에 나는 지금 약간 흥분해 있기까지 하다.

우리 선수들이 뛴 월드컵 시합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던 것은 선수들이 전같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전에 내가 보던 선수들이 아니었다. 그들 안에서, 오랜 훈련 기간에 쌓은 기술과 정보, 무수한 경기를 통해 얻은 능력과 경험이 폭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다. 연쇄폭발을 거듭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산대사께서 그러셨을 것이다. 장히 어려운 일이기는 하겠지만, 목숨을 걸고 머리를 들이민다면 모기에게도 무쇠솥을 뚫는 일이 가능하다고 그러셨을 것이다. 이 연약한 머리로 과연 무쇠솥을 뚫을 수 있을까, 눈알을 터뜨리는 것은 아닐까, 흡혈관을 찌그러뜨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등등의 사량분별(思量分別)을 뚝 끊고,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선승(禪僧)처럼 목숨을 걸고 무쇠솥으로 돌진하면 능히 뚫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점 의심도 없이 들어가면,거기가 바로 한 소식의 자리인 여래의 경지(一超直入如來地)라는 것이다. 나도 이 말씀을 믿는다. 내 아들은, 미국전에서 안정환이 동점골을 넣는 순간, 너무 기뻤던 나머지 콘크리트 벽을 걷어찼는데, 그 벽에 구멍이 뻥 뚫리더란다.

내게는 글과 관련된 정보가 풍부하다. 글을 쓴 경험도 꽤 있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 축구 선수들처럼 정보와 경험을 폭발시켜본 적이 없다. 나는 서산대사의 모기처럼 무쇠솥을 향하여 사량분별이 끊긴 절언절려의 경지에서 돌진해본 적이 없다. 이제 알만하다. 나도 내 속에 쌓인 정보와 경험을 폭발시켜야 할 것 같다. 풍부한 정보와 경험의 소유자들인 내 연하의 친구들에게 서산대사 말씀을 다시 들려주고 싶다.

'장히 어려운 일이기는 하겠지만,목숨을 걸고 머리를 들이민다면 모기도 능히 무쇠솥을 뚫을 수 있느니라.'

▶약력=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작품집에는 『나비 넥타이』 『두물머리』 등이 있다. 1998년 동인 문학상, 99년 한국번역가상, 2000년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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