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이야기 마을] 일흔 즈음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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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며칠만 지나면 한 살을 더 먹는다. 1년이란 시간이 지나면 나이도 한 살을 더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이치인데도 올해만은 이를 거부하고 싶다. 60대에서 70대로 바뀐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싶지 않아서일까.

새해가 와도 나는 한 장 남은 12월 달력을 떼어내지 않고 설날이 오기까지 걸어두리라. 설이 지나면 다시 8월이 오기까지는 내 생일이 지나지 않았다는 이유를 대며 내가 일흔살이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련다. 아무리 화장으로 포장하고, 힘들여 염색하고 새벽마다 약수터에 나가 죄없는 나무들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괴롭혀도 세월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이 무슨 고집이며 눈물겨운 저항이란 말인가.

"여보, 이 알통 좀 만져보구려. 누가 나를 할아버지로 보겠소. 요즘 같아서는 300살도 자신있어." "당신도 참 주책 바가지구려. 마누라하고 자식들 다 죽고 없는 세상에 당신만 그렇게 오래 오래 살아 무슨 재미가 있겠소. 사람은 그저 갈 때가 되면 가야지."

이렇게 호언장담하던 남편은 어느 날 온다간다 말도 없이 훌쩍 나를 떠나버렸다.

그날 이후 나는 한 남자의 아내라는 소중한 신분을 내려놓고 어머니라는 이름으로만 불려야 했다. 남편을 하늘나라에서 만나는 날을 위해 나는 이 말을 준비하고 있다.

"당신이 떠난 뒤 3남1녀를 비뚤어지지 않게 키워 모두 자기 짝을 찾아 내보냈다오. 그런데 당신은 뭐가 그리 급해서 혼자만 떠났소, 남들은 노년에 서로 등도 긁어주며 손자들 재롱도 보고 부부가 손잡고 여행도 떠난다는데 당신은 왜 이 모든 재미를 내게 남겨두고 떠난 거요"라고. 그러면 남편은 아직도 그 젊고 잘생긴 얼굴로 빙그레 웃으며 "여보, 고생했소"하며 내 손을 잡아줄까. 너무 늙어버린 나를 못 알아보지는 않을까.

며느리가 부엌에서 입맛없는 나를 위해 도마에 뭔가를 놓고 토닥토닥 자르고, 볶고, 끓이고 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아직도 세상에 미련이 남아있는 나를 발견하고 흠칫 놀란다.

70세를 '예로부터 드물다' 하여 고희(古稀)라고 했던가. 내가 아무리 거부해도 나는 이제 일흔살이 될 것이다. 70세라는 나이를 거부하지 않고 이제부터 '덤으로 산다'는 마음으로 세상을 좀 더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리라.

하지만 내 마음만은 아직도 다가올 봄날, 언니들이랑 바구니를 옆에 끼고 냉이며 달래.어린 쑥.씀바귀.도라지를 캐러 산으로 들로 뛰어 다니던 귀밑머리 솜털이 보송보송한 계집아이 그대로다.

양금남(69.농업) 전북 김제군 진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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