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얼굴 붉히는 한국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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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노무현 대통령은 얼마 전 해외순방 길에서 앞으로 북핵 문제로 누구와 얼굴 붉힐 일이 있으면 기꺼이 얼굴을 붉히겠다고 말했다. 이는 대북 강경 자세를 보이고 있는 미국에 대해, 특히 미국 내 대외 강경파인 신보수주의자들 (네오콘)에게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 것이라고 풀이된다. 그런데 바깥에서는 한국 정부가 근래 대미관계에서 계속 얼굴을 붉혀 왔으면서, 이제 새삼스럽게 얼굴 붉힐 일 있으면 붉히겠다고 하니 조금 이상하다는 반응이다.

한.미 관계가 참여정부 출범 이래 많이 서먹해졌다거나 냉랭해졌다는 것은 안팎에서 많은 사람이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원인은 그동안 장갑차사건, 북핵 문제, 주한미군 이전.감축, 이라크 파병 등을 둘러싼 한.미 간의 이견 조율 과정에서 미국이 정책의 변화를 보였다거나 무리한 요구를 해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반면에 개혁의 기치를 든 한국의 참여정부가 이제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미국에 대해 줄곧 얼굴을 붉혀 왔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얼굴 붉히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한국의 대미외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세밑을 맞이하는 요즈음 한국 사회의 모습은 추위 때문인지, 송년모임의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떤 이유 때문인지 얼굴 붉히는 사람이 많고 또 얼굴 붉히는 일이 많은 것 같다.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4대 법안의 처리와 어느 의원의 노동당 입당 사실 여부를 둘러싼 여야의 대치는 얼굴을 붉히는 정도를 훨씬 지나고 있다.

강성으로 알려진 한국의 노조는 툭하면 붉은 띠를 두르고 나와 얼굴을 붉히고, 기업인들은 강성노조와 반(反)기업, 반시장 정서를 탓하면서 얼굴을 붉힌다. 수능시험 부정을 둘러싸고는 학생.교사.학부모.교육 당국이 죄책감으로, 억울함으로, 노여움으로, 그리고 자괴심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영세상인들과 서민들은 사업과 살림이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들다면서 정부를 향해 얼굴을 붉힌다. 사람의 얼굴은 어떤 감정이 크게 두드러질 때 붉어지게 된다. 화가 치밀거나, 큰 슬픔에 빠진다거나, 질투심.무안함.당혹감.수치심, 그리고 너무 기쁠 때에도 얼굴이 붉어진다. 반면 냉정하다는 표현은 이런 감정에 지배되지 않고 이성을 견지한다는 말이겠다. 감정의 표출은 자연적이며 본능적이기에 동물적이기도 하다. 반면 냉정함은 인간적이며 이성적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기서도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의 한국 사회는 감정 일변도로 치닫고 있는 느낌이다. 언필칭 상생과 공존과 화합을 내세우는 한국 사회는 지금 여야의 공존, 노사의 화합, 빈부의 상생이라는 측면에서 서로 얼굴만 붉히고 있다. 문제의 해결책을 이성적.합리적.과학적으로 진지하게 토의하거나 의논하지 못하고 서로 감정을 내세워 얼굴만 붉히고 있다.

이른바 '촛불'로 대변돼 온 한국의 시위 풍조는 한국 사회가 얼마나 감성적인가를 말해 준다. 보안법 개폐, 과거사 청산, 수도 이전, 농업개방, 사학법 개정, 그리고 아파트 재개발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를 시위로 연결시키는 행태는 일단 얼굴을 붉힘으로써 문제 해결을 시도하는 매우 감정적인 접근법이다. '○○모'와 같이 줄인 말로 표시되는 각종 모임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신용불량자와 백수들의 모임까지 있다는 데에서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지금 한국 사회는 화를 참지 못하고 한풀이와 보복을 거듭하면서 오욕칠정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고 때로는 폭발시키기까지 하는 모습이다. 그러기에 이제 한국 사회는 생각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사는 방법을 하루빨리 터득해야 한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얼굴을 붉히지 않고 얼마든지 상생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러다가 바깥에 창피해서 얼굴 붉히는 한국 사회가 될까 걱정이다.

장석정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