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정책의 운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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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군부를 포함한 북한의 강경파들은 체제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면 전쟁도 불사(辭)한다는 각오로 남한 함정을 공격한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과 북한의 전략가들은 미국의 가공할 작전계획 5027호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1973년과 92년 두차례 수정 강화된 휴전 이래의 5027호 작전계획에 따르면 북한이 남한을 침공할 경우 미군 제3해병사단과 한국군 제1해병사단이 원산에 상륙한 뒤 서쪽으로 진격해 평양을 점령한다. 한국군과 미군 보병부대는 휴전선을 돌파해 평양까지 진격해 북한 정권을 해체하고 영변의 핵시설들을 파괴한다. 특히 92년 이 작전계획은 북한이 남침준비를 하는 징조가 보이면 개전(開戰) 전에라도 한·미연합군은 전투태세를 갖추고 전진배치되는 쪽으로 수정됐다.(셀릭 해리슨의 『엔드 게임』)

북한 군부 강경파의 속셈

미국의 최신형 미사일과 작전계획 5027호는 북한 군부의 전쟁도발 의욕을 효과적으로 억제해 왔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핵무기로 선제공격할 수도 있다고까지 암시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지난달 29일 서해도발의 미스터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워싱턴 전략문제연구소(CSIS)의 북한·중국 문제 전문가 베이츠 질은 이런 견해를 e-메일로 보내왔다. "이번 사태는 북한이 오랫동안 남한을 상대로 계속해 온 경계선 침범 놀이(game)정책의 결과로 보인다. 이번에 그 게임이 통제를 벗어난 것이다." 큰 싸움으로 확대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남한 해군에 굴욕을 안기는 것은 북한 해군으로선 3년 전 서해 해전의 치욕적인 패배에 대한 복수가 된다. 군부 강경파들의 이해관계에서 보면 그것은 제임스 켈리 아시아·태평양 담당 미 국무차관보의 방북에 재를 뿌려 북한의 미사일과 핵문제를 주요 의제로 다룰 북·미 대화의 재개를 차단 또는 지연시키는 성과를 의미한다.

북한의 강경파들은 미국이 북·미 관계 정상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통해서 북한의 생존을 보장하지는 않고 미사일과 핵문제만 해결하자는 북·미 대화에 응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반대한다. 북한은 또 남한의 김대중(金大中)정부는 부시 대통령의 견제를 받아 대북정책에서 행동의 자유를 잃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군부는 비무장지대의 지뢰 제거가 전제되는 경의선 연결사업과 금강산 육로관광에 반대하는 것이다. 군부는 김정일에 대한 정면 반대로 비치지 않는 방법으로 개혁·개방 노선을 방해한다.

북한 군부와 노동당의 강경파들이 의도한 대로 서해교전은 북·미 대화의 재개를 상당기간 늦출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북·미 대화 재개의 지연보다 서해사태가 한국의 국내정치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다.

야당과 일부 여론은 금강산 관광을 중단하고 햇볕정책을 폐기하라고 요구한다.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쌀과 비료를 주고, 금강산 사업 하나로 10억달러 가까운 달러를 '퍼 준' 결과가 북방한계선 침범과 우리 함정의 격침인가라는 분노는 정당하다. 북한의 사과와 재발방지 보장을 받아야 하는 사태다.

北·美 대립속 대화는 해야

그러나 서해교전이 있었다고 햇볕정책 전체를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의 주장은 성급하다. 폐기돼야 한다는 그 햇볕정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남북대화의 중단을 의미하는가. 군사적인 대치(對峙)상황으로 복귀하자는 것인가. 햇볕정책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과 전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은 다르다.

북한과 미국이 성의있는 대화를 재개하지 않으면 내년 봄 북한의 미사일 모라토리엄이 끝나는 것을 계기로 경수로 사업과 제네바 핵합의의 존립을 위협할 위기가 올지도 모른다. 북한과 미국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현실에서 햇볕정책의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함정이 북한 함정에 기습공격 당한 책임은 햇볕정책에 있지 않고 북한 경비정의 진로를 막는 고속정의 후방, 적함까지의 유효사거리 안에 초계함을 배치하지 않은 작전실수에 있다. 우리는 북한이 노린 허점을 보였다. 버릴 것은 햇볕정책이 아니라 햇볕정책에 대한 맹신이다. 초계함과 고속정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필요하면 선제공격을 허용하는 선에서 햇볕정책의 기조는 유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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