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 감독 본지와 단독 인터뷰 - "유럽 프로 간다면 한국선수 데려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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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거스 히딩크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은 터키와의 3,4위전을 마친 직후인 지난달 30일 요코하마에서 열리는 브라질-독일의 결승전을 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히딩크 감독은 1일 일본에서 바쁜 하루를 보냈다.

오후 7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숙소인 뉴 오타니 호텔에서 金대통령 일행, 일본 고이즈미 총리 일행,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는 일왕의 사촌인 다카마도 일본축구협회(JFA)명예회장의 초청을 받아 鄭회장 가족·오카노 순이치로 JFA 회장과 함께 황거(皇居)에 있는 다카마도 명예회장의 집을 방문했다. 저녁 일정이 시작되기 전인 1일 오후 5시30분쯤 숙소인 도쿄 오쿠라 호텔에서 히딩크 감독을 만났다.

여섯시간 정도를 기다린 끝의 만남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여자친구인 엘리자베스와 유럽인으로 보이는 남자 두명과 함께 오후 4시30분쯤 호텔로 들어왔다.

엘리자베스가 그를 대신해 "약속이 있으니 잠시 기다려달라"고 하더니 한시간 후 히딩크 감독과 함께 나타났다. 히딩크 감독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었으며, 별로 피곤해 보이지도 않았다.

-어제 결승전을 본 소감이 어떤가.

"멋진 경기였다. 전세계 축구팬이 가장 수준 높은 축구 경기를 즐겼으리라 생각한다. 브라질은 특유의 개인기와 함께 팀 플레이가 돋보였다. 예전에 비해 좀 달라진 듯했다. 스콜라리 감독이 취임 후 고생을 많이 한 것 같다. 호나우두는 수퍼스타의 진면목을 보여줬다. 독일도 선전했다."

-만약 한국이 독일을 꺾고 결승에 진출해 브라질과 겨뤘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은가.

"말할 수 없다(웃음). 글쎄…, 팽팽한 경기를 했겠지만 이기지는 못했을 것 같다."

-앞으로 진로와 관련해 마음의 결정을 내렸나.

"아직까지는 어떤 결정도 내린 바 없다. 다만 지금까지 계속 말했듯이 피치(경기장 안)에서 매일 선수들과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뿐이다. 한국에서 선수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었으니까."(그는 인터뷰 도중 감독으로서 매일 피치에 서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라는 말을 여러차례 되풀이했다)

-유럽의 명문 클럽팀을 맡을 것이라는 얘기가 많은데.

"다시 말하지만 아직 결정한 바 없다.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영입의사를 보였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다. 아인트호벤으로부터는 대회 이전에 제의를 받긴 했다. 하지만 월드컵 기간에는 대표팀에만 전념하고 싶다고 답한 바 있다."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이 계속 한국 대표팀을 맡아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한국 축구 역사상 한번도 올라보지 못한 월드컵 4강을 이뤘다. 앞으로 당분간은 그같은 큰 경기(big tournament)가 없다."

-대표팀 감독이 아니라 기술고문 같은 역할을 제안받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원론적인 얘기지만 나와 대한축구협회, 그리고 한국 국민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결론을 낼 수 있기를 바란다. 자세한 내용은 곧 있을 기자회견에서 밝히겠다."

-월드컵이 끝난 시점에서 한국 축구에 대해 평해달라.

"한국 대표팀을 맡아 한국 축구가 크게 발전한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을 계속 유지해나가야 할 것이다. 한국이 이번에 거둔 성과는 우연이 아니라 계속 노력해온 결과다.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한국 축구를 모델로 삼을 것으로 생각한다. 6개월 전까지만 해도 한국 선수들은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선수들은 내가 가르치는 것들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였고 빠르게 익혀나갔다. 한국 선수들은 매일 발전하고 있다. 한국 대표팀의 선전은 한국 사회 전체에 자신감을 불어넣었다고 본다. 나로서는 더없이 기쁘고 보람있는 일이었다."

-혹시 유럽 클럽팀을 맡는다면 한국 선수 중에서 데려가고 싶은 선수가 있는가.

"만약 누굴 데려간다면 누가 가기를 원하느냐와 그가 원하는 리그가 어디냐에 달려 있다. 한국의 몇몇 젊은 선수들이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고 있다. 그들은 이미 세계 톱클라스 수준에 올라 있다. 그러나 이름을 말할 수는 없다."

-유망한 젊은 선수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유럽 등 더 넓은 곳에 나가 축구를 해야 스스로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이때 선택의 기준을 팀이나 리그의 지명도 혹은 처우 등에 두지 말고, 자신의 발전에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이 어딘가, 지속적으로 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가 등을 살펴야 할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여기서 이 정도로 끝내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2일 한국으로 돌아와 '월드컵 국민대축제'에 참석할 예정이다. 히딩크 감독은 대표선수들과 함께 서울 삼성동에서 광화문까지 카 퍼레이드를 한 뒤 광화문 특설무대에서 명예국민증을 받는다. 그리고 3일이나 4일께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의 거취와 대표팀을 맡았던 1년6개월을 정리하는 심경을 밝힐 예정이다.

한편 히딩크 감독을 만나기에 앞서 1일 낮 12시쯤에는 같은 호텔에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겸 한국월드컵조직위원회(KOWOC)공동위원장을 만나 월드컵을 끝낸 소감과 향후 한국축구 발전 방향에 대해 물어봤다.

-2002 한·일 월드컵의 총평을 한다면.

"여러분께서 협조해주신 덕분에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다. 한국팀의 성적도 좋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길거리 응원이었다. 연인원 2천만명이 길거리 응원에 나섰고 붉은색 티셔츠도 2천5백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축제가 벌어진 것이다. 이제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우리에게 이러한 엄청난 에너지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우리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앞으로 나라 발전에 큰 힘이 될 것이다."

-앞으로 한국 축구는 어떻게 발전해야 하나.

"우리가 이번에 4강에 든 것은 대단한 성과다. 아프리카 축구가 올림픽에서 두번 우승했고, 지금도 유럽 리그에서 많은 선수가 뛰고 있지만 아프리카 팀이 월드컵에서 거둔 최고성적은 8강 진출에 불과하다. 앞으로 한국 축구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무엇보다 유소년 축구가 활성화돼야 한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학원 축구가 유소년 축구의 근간인데 최근 지방을 다녀보니까 군 단위에서 학교 축구팀이 7개 정도 있다가 2~3개로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팀 수가 늘어야 할 판에 줄어든다니 이건 말도 안된다. 우선 해체한 축구팀이 다시 재결성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 프로축구팀도 현재 10개에서 더 늘어나야 한다고 본다. 월드컵을 치른 대구·광주·서울 연고 팀이 생겨야 한다. 또 국가대표 선수가 상무에 입대하면 기량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는데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상무가 프로리그에 출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히딩크 감독의 거취에 대해서는.

"그가 와서 한국 축구가 크게 발전했다. 지난 1년6개월간 히딩크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와 한국 축구 모두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거취가 결정됐으면 좋겠다."

-그에게 확실히 유임을 제의한 게 사실인가.

"사실이다. 이제 그만하자."

도쿄=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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