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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보산 사건으로 화교 박해 피바람 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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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만보산 사건의 발단이 된 수로(水路). 농수로 건설을 둘러싼 한·중 두 민족 농민들 사이의 대립은 1931년 7월 1일 만주 거주 한국인들의 법적 보호자를 자처하는 일본과 주권을 되찾으려는 중국 두 나라 경찰이 서로 발포하는 사태로 번졌다.

1931년 7월 1일 중국 만주 지린(吉林)성 창춘(長春)현 만보산 지역에서 한·중 두 민족 농민 사이에 농수로 문제로 충돌사태가 벌어졌다. 논농사를 짓는 우리와 밭농사를 짓는 그들의 차이가 빚은 이 사건은 수많은 동포 농민이 살상된 것으로 과장 보도돼 인천·서울·평양·신의주 등지에서 중국인 배척 폭동을 촉발했다. 폭동으로 중국인 142명이 사망하고, 546명이 부상, 91명이 행방불명됐다.

“만보산 동포는 안전하고 편안합니다. 지금 만주와 기타 중국 땅에 있는 우리 동포들은 아주 무사하고 편안합니다. 중국 백성들은 우리 동포에게 손을 댄 일이 없습니다. 중국에 있는 우리 동포들의 간절한 소원은 ‘국내에 있는 동포들이 중국 사람에게 폭행을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동포의 뜨거운 민족애와 굳센 민족의식을 이용하려는 검은 손이 여러 가지 탈을 쓰고 각 도시에 횡행하는 모양이니 선량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동포여, 삼가고 서로 경계할지어다(‘이천만 동포에게 고함’, 『동아일보』1931년 7월 9일자).” 송진우를 비롯한 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언론의 노력으로 폭동은 진정됐고, 중국 관민의 자제로 역보복은 없었다.

이 사설의 지적처럼, 폭동은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꿈꾸며 대륙 침략의 빌미를 찾던 ‘검은 손’ 일제의 공작에 의해 일어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일제의 민족 이간책이 부싯돌 역할을 했다 하더라도, 이 땅의 사람들 가슴속에 남아 있던 중국인에 대한 비하의식이나 증오의 기름단지가 없었다면 화교(華僑) 배척의 피바람은 불지 않았을 것이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들어온 그들은 침략자이자 문명국에 패배한 비문명인이었다. 여기에 병자호란 이후 우리 내면 깊숙이 잠재한 적개심이 더해져 ‘되놈’으로 멸시되었다. “전조선의 중국 노동자 8만 명 돌파, 이들에게 빼앗기는 노동량 막대” “올 적에는 빈손 들고 왔으나 갈 적에는 큰돈을 갖고 간다” 1930년 8월 18일자와 11월 14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 제목처럼, 1920년대 이후 급증한 ‘쿨리(苦力)’, 즉 중국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앗아가자 중국인은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79년 전 이 땅을 휩쓴 광기와 가해의 역사는 오늘 우리의 들메끈을 고쳐 매게 하는 성찰의 기억으로 정수리에 내리꽂힌다. 코리안 드림을 품고 이 땅에 온 50만 명이 넘는 이주노동자와 더불어 사는 지금, 인종과 문화가 섞일 수밖에 없는 세계화의 시대를 맞아 타자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열린 민족의식과 건강한 시민의식을 창출해 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책무 아닐까.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