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을 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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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약 반세기 전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이라는 책을 써 일약 세계적인 사회학자가 된 데이비드 리스먼 하버드대 교수가 지난 5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현대의 대중소비사회가 사람들을 동질성과 획일성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대중들은 이런 동질성 안에 자신을 몰입시켜 존재의 의미를 발견코자 하나 결국은 외로운 군중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대중들의 이러한 경향이 개인의 자율성과 사회적 자유를 오히려 위협한다고 경고했다.

오늘은 한국팀의 월드컵 8강 진출 여부가 결정되는 날이다. 우리 팀이 경기할 때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잊고 응원에 몰입했다. 몇십만, 몇백만명의 인파요, 단군 이래 최초의 단합이요 하며 우리 국민의 결속력을 놀라워하고 찬양하고 있다. 16강에 진출한 다음날인 토요일 북한산 등산을 했는데 그 산속에서도 빨간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이번 월드컵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다는 말을 실감했다.

신기루 같은 월드컵 열광

그러나 이러한 기쁨과 결속은 끝나게 되어 있다. 우리가 8강 진출을 하고, 아니 우승을 한다 해도 이것이 하나의 스포츠 행사인 한 행사가 끝나면 우리는 흩어지게 돼 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축구에 무관심했다. 프로축구 경기가 있기는 하지만 관중은 없었다. 이웃 일본과는 비교가 안되게 축구의 저변화를 이루지 못했다. 심지어 여대생들이 "남자들의 군대얘기, 축구얘기, 군대 가서 축구한 얘기가 제일 싫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축구는 천대와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가씨들이 빨간 티셔츠를 경쟁적으로 사 입고, 새벽이 되도록 구호를 외치며 길거리를 휩쓸었다. 이들은 스스로 기쁨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 지금까지 그런 젊음을 발산할 기회와 장소를 만들어주지 못했던 우리 기성세대들의 무관심을 자책한다. 그렇기 때문에 열정을 쏟아내는 그들이 예쁘고 대견하며 감사하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는 이렇게 한 마음으로 단합된 국민의 저력을 잘 가꿔나가야 한다는 소리가 많이 들려 온다. 물론 옳은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의 이런 마음들이 지속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그러나 감히 단언하건대 이런 현상은 신기루와 같아 금방 사라질 수밖에 없다. 왜냐 하면 그것이 군중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성적이기보다 감정적이며, 연속적이기보다 즉흥적이며, 주체적이기보다 유행병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그것이 비록 애국심으로 포장돼 있다 할지라도 군중의 이러한 획일성과 단일성이 무슨 큰 덕목인 양 강조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막 뒤에 숨은 세력으로부터 조종되고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월드컵 경기와 87년의 6·10 항쟁은 아무 연관이 없는 일인데도 그 날이 되살아났다는 식의 접근이나 '붉은 악마'의 응원(사실 나는 이 이름에 대해 찬성하지 않는다)과 빨간 티셔츠의 물결을 놓고 빨갱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났다는 식의 해석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것이다. 국민이 모처럼 한마음으로 단합되었는데 다시 대통령 아들의 비리를 꺼내어 되씹는 것도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 역시 고개를 갸우뚱해야 할 일이다.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며, 관중은 관중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양·다원성 존중했으면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무리 외치고 부르고 몰입하고 감동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곳에 계속 머무는 한 우리는 고독한 군중이 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우리는 다시금 엄습할 고독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고독을 통해 자신의 내면 속에서 진정 자신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러한 발견이 우리를 다양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는 다양성과 다원성 속에서 창조성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전체주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바닷물을 마신다고 갈증을 해소할 수 없듯이 군중 안에서 우리의 고독을 해소할 수 없다…. 사람은 각기 다르게 만들어졌다. 그러한 사람들이 서로 같아지려고 애쓴다면 결국 개인의 자율성과 사회적 자유는 잃고 만다." (리스먼, 『고독한 군중』 3백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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