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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탈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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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동독으로부터 탈출자들이 4000여명씩 쏟아져 들어오던 1977년 9월, 서독 연방 대법원은 주목할 판결을 내렸다. 이름하여 '탈주지원에 관한 소송'에 대한 판결이다. '탈출길이 막힌 동독인을 돈을 받고 도와주는 것'이 바로 탈주지원으로 우리의 '기획탈북'에 해당한다. 소송 내용은 '3건의 탈주계약에서 2건은 성공했으나 탈주자가 잔금 지불을 거절했고, 1건은 실패하자 선금 9000마르크를 환불하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대법원은 "탈주지원 계약은 동독의 독일인이 기본권을 활용하도록 돕는 것이므로 선의의 관습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탈주지원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판시했다.

동독은 판결에 발끈했다. 당시 동독은 탈출 행위를 '공화국 도주'로, 탈출 지원은 '출국 사주'와 '반국가적 인신매매'로 규정해 처벌하던 때였다. 우선 서독에 탈출 지원행위를 당장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나아가 동.서독 간에 통과교통협정 체결로 사실상 없어졌던 국경 검문검색을 강화했다. 이 길이 '탈주지원'의 루트라고 봤기 때문이다.

당시 교류협력이 왕성해 동.서독을 오가는 주민이나 화물이 많았는데 이를 들추고 쑤셔대고 잡아두니 원성과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서독 정부는 탈주지원 단체나 사람들을 단속하는 시늉은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탈주지원은 합법화됐다. 그렇다고 갑자기 탈출행렬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87년까지 매년 3000~5000명 사이를 오갔다. 그 가운데는 간첩도 있었을 것이다. 판결 몇해 전 일이지만 독일 헌법 보호청은 74년 당시 약 1만1000명의 간첩이 서독에서 뛰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독일 통합 직전까지 서독으로 유입된 460만 동독 이주민에는 합법 이주자, 탈출자가 뒤섞여 있다. 성분이 의심스러운 사람도, 돈을 내고 브로커를 통해 온 사람도 제법 됐을 것이다. 그러나 탈출 문제를 모든 독일인의 기본권인 '거주.이전의 자유'로 보고 지원한 서독 정부의 일관된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최근 정부가 '탈북자 종합 대책'의 일환으로 기획탈북을 단속하겠다고 했다. 탈북자를 놓고 돈 장사를 하는 게 결코 좋은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무조건 불법시할 게 아니다. 서독의 판결처럼 기획탈북을 '탈출길이 막힌 북한 주민의 기본권 회복을 돕는 것'으로 이해할 측면도 있다. 정부가 북한 눈치를 너무 봐서 단속하는 게 아니기를 바란다.

정치부=안성규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