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인 對 강도들 숨가쁜 두뇌 대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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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9면

패닉 룸(panic room)은 중세 성(城)의 망루에서 연유한 것으로 전쟁이나 천재지변을 대비한 일종의 피난처다. 뉴욕 타임스가 최근 9·11 테러 이후 미국 상류층들 사이에 패닉 룸이 비밀스럽게 유행되고 있다고 보도한 데서 알 수 있듯 패닉 룸은 재난 공포증에 걸려 있는 현대인들의 극도로 초조한 심리를 반영하는 장치다.

영화 '패닉 룸'은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방을 소유했지만 그곳이 가장 위험한 장소로 돌변하는 아이러니를 그린 완성도 높은 스릴러물이다.

바람난 남편과 이혼한 뒤 당뇨를 앓고 있는 딸 새러를 데리고 뉴욕 맨해튼의 고급 주택으로 이사온 멕(조디 포스터)은 이사온 첫날 밤 강도 세명의 습격을 받는다. 이들의 목적은 전 주인이 패닉 룸 안에 숨겨놓은 재산이다.

멕은 가까스로 별도의 전화선과 폐쇄회로 TV·환기 시스템 등이 갖춰진 패닉룸으로 숨지만 새러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패닉 룸에서 마냥 버틸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영화는 가녀린 멕과 강도들이 서로의 두뇌와 몸을 풀가동하는 숨가쁜 맞대결로 진행된다. 촬영 당시 임신 중이었다는 포스터는 임산부라는 사실을 잊은 듯 몸을 던져 연기한다. 멕은 가까스로 SOS를 친 전 남편마저 무력하게 강도들에게 포위된 상황에 이르러 절망하기도 하지만 아픈 딸을 보호해야 한다는 모성을 발휘해 초인적으로 버틴다. 여린 듯하면서도 절박한 순간에 발휘되는 냉철한 두뇌와 강인한 근성.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 자리를 거절하고 이 영화의 촬영에 응했다는 포스터는 주인공 멕의 이미지를 1백% 이상 구현하는 완벽한 캐스팅으로 보인다.

'패닉 룸'의 또 하나의 묘미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다. '세븐'으로 흥행 감독의 대열에 합류한 감독 데이비드 핀처는 '완벽주의자'라는 칭호에 걸맞게 집안 구석 구석을 헤집고 다니는 집요한 카메라 워크를 통해 폐쇄된 공간에 닥치는 재난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치밀한 전개에 비해 뒷부분은 조금 헐겁다. 가령 강도짓을 하지만 생래적 선량함을 저버리지 못해 멕 모녀에게 관대한 버냄(포리스트 휘태커)이 경찰 출동 뒤 우물쭈물하다 체포되는 식의 처리는 왠지 어정쩡하다. 15세 이상 관람가. 오는 21일 개봉.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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