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침묵한 지식인부터 자성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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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우리나라에 사회주의 사상을 심화하고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것은 1920년대에 잇따라 나온 사회주의 잡지들이다. 그 효시가 바로 '신생활'이다. 이 잡지의 창간을 주도한 일군의 사회주의 지식인들을 당대 사람들은 신생활그룹이라고 불렀다. 이 그룹은 뒤에 나온 사회주의 잡지인 '조선지광' '비판' '신계단' 등에도 여러 모로 기여했다. 이 그룹은 원래 동아일보의 주필 장덕수와 함께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장덕수가 일제에 대해 온건노선을 견지하자 이 신문사 논설반 기자로 있던 김명식은 상해파에서 뛰쳐나와 장덕수와 대립각을 세우며 잡지 발행에 나섰다. 그는 동지를 규합해 1922년 3월에 '신생활'을 창간했다.

이 잡지의 진용은 좌파 일색이 아니었다. 사장에는 당시 우파 명망가인 박희도를 앉혔다. 그는 뒤에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지탄을 받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3.1운동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비타협적 우파 민족주의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신생활그룹이 그를 사장으로 옹립한 데에는 우파 민족주의자와 연대하되, 비타협주의자에 국한한다는 좌파의 합작 원칙이 깔려 있었다고 봐야 한다.

최초의 사회주의 잡지인 '신생활'은 거침없는 필치로, 자본주의는 몰락하게 돼 있으며 민중을 중심으로 새로 운동진용을 짜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가 망하게 되어 있다는 주장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멸망론을 해설한 것이지만, 일본 자본주의도 필연적으로 망한다는 신념을 대중화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민중주의를 들고 나온 것은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을 소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유약한 지식인만으로는 투쟁다운 투쟁이 불가능하다는 3.1운동 이후의 자성을 반영한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잡지 이후에 나온 사회주의 잡지들이 유물론이나 변증법, 사적 유물론 등과 같은 사회주의 기초철학을 논하는 데 정열을 쏟은 반면에 '신생활'만은 그런 주제에 관한 논설을 단 한 꼭지도 싣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못 크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것은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해서가 아니라 일본 자본주의도 곧 망하게 되어 있다는 기대 어린 신념을 바탕으로, 투쟁을 위해서는 민중 중심의 새로운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전략적 사고 때문이었음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1920년대에 사회주의를 양산한 주범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일제의 파시스트적 식민통치였다. 그 시대에 사회주의가 지식인사회를 휩쓸도록 조력한 것은 투쟁 국면을 급속하게 유화 국면으로 전환한 우파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절망의 벽 앞에서 젊은 지식인들이 기댈 언덕은 허무주의 아니면 사회주의뿐이었다. 1920년대의 민족운동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 교훈을 내재화하는 데 실패해 60여년이 흐른 뒤에 사회주의자를 대량 생산했다. 신군부 세력이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일제 무단통치 못잖은 혹독한 독재를 자행하는데 기성 지식인들은 숨죽여 침묵으로 일관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나 주체사상이 젊은이들을 사회주의자로 만든 게 아니라 군부독재와 나약한 기성 지식인들이 젊은이들을 왼쪽으로 왼쪽으로 내몰았다. 뒷날 급진좌파를 구축(驅逐)한 것은 감옥이나 고문이 아니라 민주화였다. 민주화 이후에 급진좌파는 햇살에 안개 걷히듯 사라졌다.

일부에서는 그때 급진좌파였던 사람들에게 커밍 아웃 하라고 한다. 그럴싸한 말이지만 정작 커밍 아웃 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다. 독재자들, 그 휘하에서 열심히 심부름한 사람들, 그런 상황에서 굴종한 기성 지식인들이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그들의 자성에 바탕을 둔 도량(度量)이 비로소 통합과 상생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김민환 고려대 교수.언론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