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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걸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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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음, 아마 다음 작품일걸."

한창때의 찰리 채플린이 한 말이다. "생애 최고 걸작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엔 녹음기 틀 듯 이 말을 반복했다. 그때까지의 작품이 시원찮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주옥같은 명화를 만들었지만 정작 본인은 앞으로 더 잘 만들 수 있다는 여지를 뒀던 것이다. 늘 발전하려는 '향상심(向上心)'이라고나 할까.

지난 8월 작고한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도 생애 내내 향상심이 식을 줄 몰랐다. 그는 사진의 거장으로 군림했으면서 돌연 회화로 활동무대를 바꿨다. 자신이 목표로 한 최고의 경지에 도전하기 위해 이미 이뤄놓은 업적을 깡그리 무시한 것이다. 이런 노력이 쌓여 그는 사진사가 아닌 예술가로 칭송받았다. 1999년 그의 생애를 되돌아보는 한 인터뷰에선 "아직도 정복해야 할 게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정도다. 이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론 있지. 바로 죽음이야"라고 답했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일본의 금형 기술자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도쿄(東京)에서 만난 60대의 금형기술 장인에게 "당신이 만든 최고의 금형은 무엇이었나"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글쎄, 좀더 만들어봐야 알겠는데…"라며 답을 흐렸다. 소니나 포드와 같은 세계적인 기업에 금형을 납품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랬다.

최고의 고수들에겐 남다른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늘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와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높고 멀리 정해둔 목표를 향해 내달렸다. 자신을 완전 연소시키면서. 물론 힘들었겠지만 '힘들다'는 불평은 하지 않았다. 나에게 쉼표는 있을지언정 마침표는 없다는 식으로 계속 최고를 추구했다. 그러곤 최고의 경지에 올라섰다.

불황에, 정쟁에 시달린 올해는 모두들 한번쯤 '힘들다'는 말을 했음 직하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나만의 최고 걸작을 만들어 보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다져 보면 어떨까. 그래서 내년을 '생애 최고의 해'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 보자. 거장이 아니라도 흉내는 내볼 만하다. 안 되면 어쩌나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생애 최고의 해는 '그 다음해'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남윤호 패밀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