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喜東奎'신드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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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름은 희동규(喜東奎=기쁜 동방의 별)로 지으세요."

축구 국가대표팀 히딩크 감독에 대해 아예 귀화해 대한민국 국민으로 남아달라는 국민들의 성화가 뜨겁다. 이 푸른 눈의 외국인이 2002년 6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오대영 감독' 500일 작전

히딩크라는 이름은 각종 포털 사이트의 인기검색어 목록에 올라 있다. 지난 한달간 그의 이름이 들어간 일간지 기사만 1천건에 이른다. 히딩크 인형과 티셔츠는 없어서 못 팔 정도이고, 기업들은 앞다퉈 '히딩크 리더십'에 관한 연구보고서를 내고 세미나를 열고 있다.

한국 축구에 월드컵 사상 첫승을 안겨준 그는 쏟아지는 찬사를 들을 자격이 있다. 폴란드전 승리를 아무도 '운이 좋았다'고 하지 않는다. 실력으로 이겼고, 그 여파는 놀랍다. 업그레이드된 한국 축구를 세계에 알리고, 아시아의 자존심을 지켰다. 무엇보다 국민통합에 기여했다. 이만큼 온 국민을 기쁘게 해준 일이 과거에 있었던가.

그러나 1년 전, 아니 몇달 전을 보자. 올 초 북중미 골드컵 대회에서 1승1무3패(1승도 그나마 승부차기 승)로 부진할 때만 해도 '외국인 감독 무용론'이 팽배했다.

지난해 초 부임한 그에게 대표팀 감독이란 자리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취임 얼마 뒤 프랑스와 체코에 잇따라 5-0으로 지자 '오대영 감독'이란 비아냥까지 들었다.

"휴가가 너무 길다"에서부터 "말도 안 통하는데 선수들을 지도할 수 있겠느냐" "바꾸려면 빨리 바꾸는 게 낫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가 이런 비난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불과 20일 전 스코틀랜드에 이긴 다음부터였다.

히딩크 리더십을 연구한 재계 인사들은 "그의 승리는 장기 계획의 결실"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는 한국 축구에 경쟁 원리를 도입하고, 체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일들은 그러나 시간이 필요한 것들이다. 그는 아마 부임 때 이미 월드컵 개막에 맞춰 5백일 작전을 짰던 것 같다. 그리고는 욕을 먹더라도 묵묵히 자기 길을 걸었다. 대표팀의 지난 5백일간 평가전 성적이 13승9무10패로 신통치 않았던 것은 늘 강팀과 붙었기 때문이다. 단기 성과에 연연했다면 약체들과 시합해 국민들에게 허상을 심어줬을 것이다.

반면 사우디아라비아는 프랑스 월드컵 이후 감독을 12번이나 교체한 끝에 이번 대회 첫 게임에서 독일에 0-8로 대패했다.

문제가 생기거나 불만이 있으면 사람부터 갈아치우려는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한 결코 일류가 될 수 없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백년대계라는 교육 행정을 책임지는 교육부장관은 현 정부 들어 일곱번이나 바뀌었다. 건설교통부 직원들은 지난해 무려 다섯명의 장관을 모셔야 했다. 현 정부의 장관 평균 재임기간은 11개월 정도. 5공 18개월, 6공 14개월, 김영삼 대통령 때 12개월 등 점점 짧아지는 추세다.

냄비체질로는 일류가 못돼

자리가 불안하니 책임질 일은 꺼리게 되고, 소신이 생길 수가 없다. 장관이 과객(過客)인 풍토에서 정책의 일관성이나, 직원들의 충성심도 기대하기 어렵다. 전경련이 최근 주한 외국기업 43개사를 설문조사한 결과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로 '정책 일관성 부족'이 꼽혔다. 잘 뽑고, 뽑은 뒤엔 믿고 맡겨야 한다. 그런데 잘 뽑았는지, 못 뽑았는지를 판단하는 데 1년은 너무 짧다.

벼랑에 몰렸던 한국 축구를 되살리는 데 이번에 5백일이 걸렸다. 그러면 다음 대표팀 감독도 누가 되든 최소 5백일은 보장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히딩크 신드롬은 '냄비 체질로는 결코 일류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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