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들이여, 책을 써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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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호 35면

한 권의 책을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여성이 임신해 출산할 때까지 10개월이 걸린다. 대강 추산해도 그 정도의 기간은 쏟아 부어야 책 한 권이 완성된다. 출산과 출판은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잉태하고 있는 동안 다른 것은 희생하고 곧 세상에 나올 ‘아가’와 ‘책’에만 몰두해야 한다는 점이 그렇고, 막상 끝마치고 나면 해냈다는 기쁨과 후련함 못지않게 더 큰 책임감이 다가오는 것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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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은 쉽게 책을 낸다. 총선이나 당내의 각종 선거 때 자신을 알리는 유용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책 쓰기를 아주 꺼리는 직업군도 있다. 법조인, 특히 검사들이다. 어느 조직에나 예외는 있다. 며칠 전 정상환 서울중앙지검 형사7부장을 만났다. 그는 워싱턴DC에 위치한 주미 한국대사관의 법무협력관으로 2007년 파견돼 3년간 근무했다. 두세 달 전쯤 임기를 마치고 귀국해 지금의 보직을 맡았다. 정 부장검사는 이런저런 얘기 도중에 책 한 권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제목은 검은 혁명, 부제는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쿤타 킨테에서 버락 오바마까지’였다. 흑인 민권운동의 흐름을 고비마다의 역사적 판결과 함께 정리한 것이었다. 그는 “주말에 골프 치는 대신 도서관에서 자료를 구하고 현장을 찾아다니며 쓰긴 했는데 어디 내놓을 만한 건 아니다”며 겸연쩍어했다.

대검 공안기획관으로 근무하는 봉욱 검사는 미국의 힘, 예일 로스쿨의 저자다. 책에서 그는 예일대 로스쿨에서 공부했던 경험을 토대로 예일대의 한국인 파워와 미국 검사들의 삶을 소개했다. 현직 검사가 로스쿨 관련 책을 냈대서 화제가 됐었다. 구본진 법무연수원 교수는 글씨 수집과 필적학의 전문가다. 그가 항일운동가 400여 명과 친일 인사 150여 명의 글씨를 분석해 쓴 책 필적은 말한다는 전문가의 수준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들 세 검사에겐 공통점이 있다. 모두 40대 중반에 지적 호기심이 뛰어난 학구파다. 노는 것보다는 어떤 분야에 천착하기를 즐긴다. 그 속내까지야 모르지만 왠지 스폰서 문화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검찰 조사에 이어 징계까지 끝난 마당에 다시 특검 조사를 받아야 하는 부산지검 스폰서 검사 사건을 보면서 이들에게도 ‘책 쓰기’의 시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책 쓰기에 매달리는 동안은 과도한 술자리엔 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기자는 전·현직 검찰 고위 인사들을 만날 때면 한 번쯤은 검찰 후배를 위해, 나아가 후대를 위해 기록을 남기라고 권한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검사가 무슨 책을 써. 수사 기록으로 말하는 거지. 남들이 자화자찬한다고 욕이나 할걸”이다. 하지만 수사 기록만으론 다 말하지 못하는 것도 많다. 전직 대통령이 연루된 역사적 사건이나 대선 자금 사건, 국가정보원 도청 사건 등 검찰이 수사했던 역사적 사건은 수두룩하다. 그 사건에 대한 생생한 기록은 전무하다. 겉으로 드러난 수사 착수의 배경과 수사 결과는 캐비닛 속의 기록만으로 다 알 수 있다. 검찰 수뇌부나 수사 검사의 인간적인 고뇌, 검찰 조직의 움직임, 집권 세력과의 충돌 등 사건의 이면을 관통하는 비공식 기록을 남겨야 한다. 검사 선배들이여! 진짜 기록을 남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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