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나인 니글렉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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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호 33면

1970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참모로부터 인종 문제와 관련한 보고서를 받았다. 쓴 사람은 나중에 민주당의 뉴욕주 상원의원이 된 대니얼 모이니핸. 2003년 그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상원에 진출한 이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다.
보고서의 요점은 정치·사회적으로 잔뜩 과열된 인종 문제를 그냥 내버려 두자는 거였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땐 잠시 지켜보면서 냉각기를 갖는 게 좋다는 취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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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니핸은 이를 ‘비나인 니글렉트(benign neglect)’라고 표현했다. 우리말로는 선의의 무시, 은근한 외면, 소극적 방임쯤 된다. 정부가 굳이 나서지 말고 모른 척 내버려 두는 게 당사자에겐 더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에서 흑인의 인권은 과거에 비해 많이 개선된 상태였다. 그런데도 인종 문제에 대해 소모적인 논쟁이 이어지고 있으니, 이를 그만두고 실질적인 권익 보호가 정착되도록 하자는 뜻에서 한 정책 건의라고 한다.

하지만 보고서가 공개되자 그는 궁지에 몰렸다. 소외당하고 차별에 시달리는 흑인들을 방치하려는 사람으로 비판받은 것이다. 그의 말을 비틀어 ‘악의적인 무시(malign neglect)’란 표현도 나왔다. 논지를 거두절미한 상태에서 일어난 오해였다. 뉴욕 타임스는 그의 부고 기사에서 이 정책 건의가 “널리 오해받았다”고 지적했다.

‘비나인 니글렉트’는 외교나 경제용어로도 쓰인다. 외교적 불개입 정책이나 시장방임적 환율정책을 의미한다. 예컨대 미국이 특정 국가와 교류를 끊음으로써 그 나라를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거나 달러 약세를 은근히 방치해 미국 기업의 수출경쟁력을 높이려 할 때 미국 신문들이 자주 쓴다.

물론 당하는 입장에선 기분 나쁜 경우가 많다. 미국은 ‘비나인 니글렉트’라고 하지만 상대방은 ‘악의적 무시’로 받아들인다. 폴 볼커 미 경제회복자문위원회 의장은 자신의 저서 『체인징 포춘스』에서 ‘비나인 니글렉트’라는 말이 달러 약세를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져 미국의 무역 상대국들과 마찰을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했다. 외교나 경제에서 사용되는 ‘비나인 니글렉트’의 뜻은 모이니핸의 원래 의도와는 제법 거리가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 금융계에서도 ‘비나인 니글렉트’로 부를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검찰 수사에서 금융실명법 위반이 확인된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에 대해 감독 당국이 가만있는 게 그렇다. 창구 직원이 저질렀다면 당장 중징계를 받을 사안인데도 책임이 더 막중한 금융지주 회장은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있다. 알고도 모른 체, 점잖게 눈감아 줌으로써 사달을 피하려는 것일까. 이를 문제 삼는 언론엔 되레 “무슨 섭섭한 일 있느냐”고 묻는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금융 당국의 고위 간부에게 물어봤다. 왜 가만있느냐고. 돌아온 답은 이랬다.
“좀 더 지켜보시죠.”

영락없는 ‘비나인 니글렉트’다. 이게 얼마나 갈 수 있을까. 그 답을 해 줄 분, 이미 정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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