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당 '토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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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63면

남들이 쉽게 말하는 '밥장사'에도 열정이 필요하다.

단순히 돈벌이를 위한 열정이 아니다. 내가 만든 음식이 먹는 이의 살이 되고 약이 된다는 철학이 깔린 열정이다. 이런 열정이 없으면 갓 지어낸 밥이 입안에선 뜨거울지 몰라도 뱃속에 들어가선 편하지 않다. 반면 얼음이 동동 뜬 냉국도 열정이 담기면 목젓을 넘어갈 땐 찼어도 속에서 탈이 나질 않는다.

서울 장충체육관 뒤에 있는 '토방'(土房·02-2233-3113)이란 한식당은 오랜만에 밥장사의 뜨거운 열정을 느낀 곳이다. 매실을 제철에 사들여 1백일 동안 발효시킨다. 쑥·대추·인삼 등도 마찬가지다. 이런 재료 30여가지를 손수 만들어 조미료 대신 쓴다. 민물새우로 토하젓을 만드는 데도 3년 동안 공을 들인다. "먹는 이의 속이 편해야 내 뱃속도 편하기 때문"이란 게 이 집 여주인 김인숙(41)씨의 설명이다.

토방의 음식은 전라도 한정식이다. 종가집 큰 살림을 맡았던 외할머니의 요리 솜씨를 치마 폭에서 되물림받은 여주인이 풀어 놓은 것. 장보기부터 재료 손질에 이르기까지 직접 해낸다. 특히 음식 맛을 좌우하는 장·젓갈·장아찌는 예외가 없다.

저녁 상차림으로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토속 정식(3만8천원). 계절에 따라 메뉴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콩죽·효소 소스 샐러드·손두부·생선회·버섯들깨탕·조기조림·삼색전·붕어우거지탕·약닭·재첩국·삼합의 순으로 코스가 이어진다. 이 가운데 연근·양상추·상추·키위·배 등 6~7가지의 야채와 과일을 이 집만의 천연발효 소스로 무쳐 낸다. 달면서 새콤하지만 인공소스의 맛과 다르다. 깊이가 있고 살아있는 맛이다.

들깨와 맵쌀을 갈아 표고버섯·토란을 넣어 끓인 들깨버섯탕은 속이 약한 노인이나 유아에게도 편안한 음식이다. 한약재 30여가지를 넣고 삶은 약닭에는 토하젓과 콩나물잡채가 곁들여진다. 약닭은 푹 삶았는 데도 푸석푸석하지 않고 입안에서 차지면서 부드럽게 씹힌다. 토하젓을 찍어 먹거나 매콤새콤한 콩나물잡채와 함께 먹으면 더욱 맛있다. 그러나 닭보다는 국물에 온갖 엑기스가 모여 있으므로 남기지 말 것. 푹 삭은 홍어회·삶은 삼겹살과 묵은 김치가 나오는 삼합은 보기만해도 입이 즐겁다.

후식으론 한지에 곱게 싸서 나온 유과를 대하면서 '좋은 음식을 제대로 먹었구나'하는 생각에 뱃속이 더욱 편하다.

상견례 등 조용한 모임자리로 알려져 예약을 해야 불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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