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에너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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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노을이 짙어지고 조명은 빛을 더해가던 하프타임에 사람들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모두가 2-1이라는 전반전 스코어를 믿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상대가 누군가. 바로 1년 전 우리에게 5-0의 수모를 안겨준 세계 최강 프랑스가 아닌가.

결과는 3-2 재역전패였지만 누구도 실망하지 않았다. 전원 기립박수를 보냈다. 박지성의 동점골에 이어 설기현이 벼락같은 헤딩으로 역전골을 넣었을 때 옆자리의 학생은 "이게 꿈은 아니지요"하며 목이 메었다. 서울 상계동에서 전철·버스 갈아타고 왔다는 할아버지는 휴대전화에다 소리 소리 외치고 있었다. "TV 보고 있냐, 아들아. 구경 보내줘서 정말 고맙다." 수원 구장뿐이 아니었다. 광화문에서, 시골 농가에서도 환호는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거대한 에너지였다. 우리 선수들의 눈물겨운 선전은 축구 후진국의 열등감을 한번에 날려버렸다. 그들과 호흡을 함께 한 국민은 외환위기와 신용 후진국의 스트레스를 함께 날려버렸다. 월드컵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바로 이런 에너지다. 비록 16강 진출에 실패할지라도 최선을 다한 경기로 선수단과 국민이 이틀 전 같은 에너지를 만들어낸다면 우승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월드컵의 경제적 성과는 에너지의 크기나 분출 방향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지난주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 보도에 따르면 1998년 대회 개최국 프랑스의 경우 우승까지 거머쥐면서 프랑스 대혁명 이후 초유의 국민적 열기가 생산 및 소비에 반영돼 효과가 커졌다. 98년 상반기 프랑스 평균 주가는 40% 가량 상승했으며, 이 해 경제성장률(GDP 기준)은 3.5%로 90년대 중반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우리나라 월드컵조직위원회는 이번 월드컵에서 8조8천억원(69억달러) 상당의 경제적 효과와 35만명 가량의 고용창출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이런 추정치는 앞으로 한달 간의 월드컵 에너지 생산 결과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70년대 잉글랜드 프로축구에서 리버풀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축구인 빌 섕클리는 81년 세상을 떠나면서 "축구는 죽고 사는 문제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수원 구장을 가득 메웠던 4만5천여 관중들은 어렴풋이나마 섕클리의 말에 공감할 것이다. 월드컵은 그렇게 우리 모두에게 다가왔다. 이제 시작이다.

손병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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