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보다 소리가 더 좋 ~ 구나 - 갑우정밀 사장 명창 박수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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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3면

먹고 살 만하니

소리 한다구?

그깟 기계

파는 것보다

우리 소리에

혼을 싣는 게

더 중요해.

36년 전에 만난

떠돌이 스승에게

3년간 사사하고

그 후로

30년 가까이 기계소리와

불협화음으로

소리를 연마했어.

몇년 전 러시아 사람들이

내 소리를 듣고

전율하더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소리라고.

다음달 11일 미국 워싱턴의 케네디센터 콘서트홀 무대에서는 상여소리를 비롯한 한국 동부민요 열두곡이 2시간30여분 동안 울려 퍼진다.

1990년대 후반 우리 국악계에 혜성처럼 나타나 공연무대마다 4천~5천명씩의 청중을 끌어들였던 명창 박수관(朴水觀·48)씨가 단독 공연한다.

"한국음악이라면 판소리만 있는 줄 알았던 서양 음악계에도 메나리조 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동부민요 신드롬'을 불러 일으킨 그는 '명장(名匠)·명창(名唱) 박수관'으로 통한다. 그는 갑우정밀의 최고경영자(CEO)이기도 하다. 좀체 어우러질 것 같지 않은 두 가지 일에서 일가를 이룬 셈이다.

그러나 그가 소리하는 것을 살만해진 사람의 취미쯤으로 여겼다가는 면박을 받는다.

"수십억원어치의 정밀기계를 수출하는 일보다 우리의 혼이 실린 소리를 되살리는 작업이 내겐 더 절박합니다."

동부민요가 전공이고 기계공학은 부전공이라는 얘기다.

동부민요는 경기·서도·남도소리에 맞서는 경상·강원·함경도 지방의 토속민요지만 근 한세기 동안 맥이 끊기다시피 했다. 상여소리·정선아라리처럼 폐부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려 일시에 터뜨리는 듯한 메나리조 창법은 듣는 이들을 울리는 소리다.

경남 김해 태생의 박명창은 일곱살 무렵부터 각설이 타령·상여소리 등으로 곧잘 동네사람들을 웃기고 울렸다.

만석꾼 소리를 듣던 가세가 일시에 기울어 부산으로 솔가했던 열두어살 무렵, 부산진역 앞에서 떠돌이 행색의 소리스승을 만났다. 김로인(金路人)으로만 기억하는 이 동부소리의 달인은 끼가 엿보이는 소년 제자에게 3년여 동안 가슴에만 담아 두었던 메나리조 소리의 모든 것을 전수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던 가정 형편이 소리공부에는 오히려 득이 됐다.

최고의 기술자가 되어 집안을 일으키겠다며 부산기계공고에 들어간 박명창은 "실습실에서 밤새도록 쇠를 깎으면서도 쉬지 않고 소리를 했다"고 회고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30대 초반에 정밀기계업체인 갑우정밀을 일으켰다. 40대 초반에는 공학박사와 금형제작기술 부문의 명장이 됐다.

정밀기계 가공과 소리를 함께 연마해 온 그는 96년에야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국제민요 학술대회에 논문 '한국 부전(不傳)민요 연구'를 발표하면서 자신의 소리무대를 해외에서부터 열기 시작했다.

러시아 음악가들이 '전율을 느낀다''세상에서 가장 슬픈 소리'라고 극찬한 그의 메나리조 소리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러시아 3대 음악대 가운데 하나인 글링카음악원은 그에게 명예 음악박사를 수여하고 메나리조 소리 교육원을 열어주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99년 한해에 전국민요경창·전통공연예술경연·남도민요경창 등 3대 대회를 석권하며 단번에 메나리조 소리를 복권시켰다.

이후 그는 초청을 받아 뉴욕 카네기메인홀에서 독창했고, 하이델베르크 국제음악제에서 공연했다. 또 뉴욕 링컨센터 9·11 추모음악회에 주연으로 출연했고, 미국 아시안의 달에 백악관에서 공연했다. 지금까지 1백30여회에 걸쳐 국내외 무대에서 동부민요를 선보였다.

2000년 6월 로마 공연 때는 파바로티의 스승인 이탈리아 성악가 주제페 타페이에게서 "난생 처음 듣는, 가장 훌륭한 성악"이라는 극찬을 들었다.

지난해 11월의 국립국악원 예악당 공연, 이달 초 부산 KBS홀 공연 때를 비롯한 국내 무대에서도 그는 화제를 몰고 다녔다.

국악계에서는 "국악 공연장에도 이토록 많은 청중이 몰릴 수가 있는가"라며 놀라워 했다. 갈수록 불어나는 메나리조 매니어들은 공연 후에도 그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박명창은 지난해부터 경주 황룡산에 토막(土幕)을 짓고 동부민요를 이어갈 제자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소리 수업을 계속하고 있다.

소리 인생을 '수도승의 고행'에 비유하는 그는 "공연 전에 화를 내기만 해도 벌써 소리가 죽어 나온다"고 했다.

"메나리조 소리가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기교를 부리지 않는 참 소리이기 때문"이라는 박명창의 애창 레퍼토리는 '영남 들노래'와 '상여 소리''치이야 칭칭나네'다.

특히 '영남 들노래'의 '말은 가자고 굽이를 치고 님은 잡고서 낙루를 하네…'라는 대목에 이르면 그의 시선은 먼 산에 머무른다.

정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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