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政爭중단' 말로 끝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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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치권의 정쟁(政爭) 중단 선언이 공염불로 끝날 위기에 놓였다. 검찰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차남 홍업(弘業)씨를 월드컵 이후에 소환하겠다는 방침을 내놨기 때문이다. 검찰의 발표는 공교롭게도 24일 한나라당 서청원(徐淸源)대표가 "월드컵 기간 중 모든 정치적 투쟁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뒤 몇시간 만에 나왔다.

한나라당은 "뒤통수 맞았다"며 발끈한 분위기다. 남경필(南景弼)대변인은 26일 "특정 지역 출신의 일부 정치 검찰이 이명재(明載)검찰총장의 강력한 수사 의지에 반발하는 기류가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검찰 내부에서 이회창 후보의 장남 정연(正淵)씨에 대해 병역 면제 경위를 재조사한다는 얘기나 'K제약 주가조작 연루설' 등이 흘러나온 것은 이런 맥락이라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홍업씨 소환을 연기한다는 결정이 결국 민주당 선거 전략의 일환이라고 보고 좌시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따라서 27일 대검 항의 방문 이후에도 검찰이 입장을 바꾸지 않으면 국회 원구성 후 특검제 조기 도입을 위해 당력을 집중하겠다고 예고했다.

반면 얼마 전까지 검찰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표출했던 민주당은 이번엔 검찰을 감싸고 나섰다. 정범구(鄭範九)대변인은 "한나라당은 자칫 속좁은 정치로 보일 수 있는 모습을 자제해 주기 바란다"고 주문했다.

검찰은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공개적 대응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대검 중수부의 한 관계자는 "홍업씨에 대한 수사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월드컵을 감안해 속도를 조절하겠다는 것"이라며 "이 기간 중에도 계좌추적과 참고인 조사는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6·13 지방선거를 목전에 두고 한나라당으로선 홍업씨 문제를 집요하게 추궁해야 할 입장이다. 당 관계자는 "홍걸씨 비리가 개인적인 차원이라면 홍업씨 문제는 DJ 비자금·아태재단 등 정권의 구조적 비리와 직결돼 있어 레벨이 틀리다"고 강조했다. 조만간 국회가 열리면 홍업씨 문제를 놓고 한나라당·민주당 간의 충돌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얘기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 일각에선 결과적으로 徐대표의 '정쟁 중단 선언'이 좀 성급했던 것 같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김정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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