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캐피털 '시름의 세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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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벤처의 봄은 언제쯤 올까.

올 들어 경기회복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되지만 봄기운조차 느끼지 못하는 곳은 비단 벤처업계 뿐만이 아니다. 신생 유망업체의 자금줄을 자임하는 벤처캐피털 업계 역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덩달아 한겨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양창업투자의 정진석 사장은 "각종 '게이트'로 벤처가 위축된 데다 코스닥 등록 심사마저 까다로워져 벤처캐피털 업계가 새로이 투자할 곳을 찾기 힘들고 이미 투자한 돈을 회수하기도 어려운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규모가 작은 벤처캐피털은 규제를 피해 창업투자회사 면허를 반납하고 투자자문회사나 인수합병(M&A)중개회사로 변신하는 일도 잦다.

◇바늘구멍인 코스닥=벤처캐피털의 가장 큰 어려움은 투자한 벤처기업의 코스닥 등용문이 크게 좁아진 점이다. 당국이 벤처 규제를 강화해 올 들어 코스닥 관문을 반쯤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코스닥위원회에 따르면 이달 중순까지 등록 예비심사를 청구한 85개 기업 중 54%(46개)가 심사를 통과했다. 지난해 이 비율이 82%였던 점에 비하면 문이 크게 좁아진 것이다.

이처럼 투자처의 기업공개(IPO)계획이 어그러지면서 투자금 회수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국내 대표적 벤처캐피털인 KTB네트워크와 한국기술투자의 경우를 보면 올해 30~40개 투자업체를 코스닥에 올린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목표달성이 어려울 전망이다. 올 들어 각각 13,7개 업체를 코스닥 예비심사에 올렸지만 6,3개밖에 통과시키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는 벤처투자의 위축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지난 1분기 회원사들의 신규투자가 1천8백47억원으로, 극히 저조했던 지난해 같은 기간(1천8백11억원)과 비슷했다.

투자부진은 특히 자본금 1백억원대의 군소 업체들에 심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벤처투자 붐이 극성이던 1999년 말~2000년 초에 설립된 업체들로 기반이 튼튼하지 못한 곳이 많았다.

협회의 이경호 조사팀장은 "기업 결산이 끝나고 영업실적이 집계되는 4월이면 벤처투자가 기지개를 켜는 게 전례였지만 올해는 좀체 활기가 살아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업종 전환도 늘어=중소기업청에 따르면 올들어 아이비벤처캐피탈·에이원창업투자 등 5개사가 창투사 면허를 반납했다.

중기청 관계자는 "창투사 규제를 받지 않고 운신의 폭이 큰 투자자문사 등으로 변신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씨비에프기술투자·화이텍기술투자처럼 다른 회사와 합치는 경우도 생겼다.

이에 따라 지난해 말 1백46곳이었던 창투사는 1백39곳으로 줄었다. 이미 인수합병 대상임을 선언한 경우까지 치면 올 들어 10개사 이상이 줄어든 셈이다.

그래도 형편이 낫다는 대형 벤처캐피털도 근래 각광받는 기업구조조정전문회사(CRC) 등을 겸업하기 시작했다.

벤처캐피털 업계는 상황이 어려워지자 ▶보호예수제도(록업)의 개선▶최대주주의 주식소유 변동 제한 요건의 완화 등을 바라고 있다.

이영탁 KTB네트워크 회장은 "투자자 보호를 위해 코스닥 심사를 강화했다지만 결과적으로 벤처업계의 돈가뭄과 코스닥 위축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규제 일변도의 코스닥 관리보다 미국 나스닥처럼 진입·퇴출을 모두 쉽게 하는 쪽으로 정책이 바뀔 때가 아닌가 싶다"고 주장했다.

이현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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