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의 진실 감추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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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일본 보수우익 세력이 1990년대부터 일제의 침략역사를 은폐·축소·미화한 역사교과서를 만들자고 주장하면서 내세운 논리가 '자학(自虐)사관'의 탈피였다.

이들은 "과거의 작은 잘못을 확대해석해 스스로를 비판하는 것은 자학사관이다.

학생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역사를 가르치니까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없어진다. 이제는 조상들의 빛나는 업적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침략 역사를 왜곡해 파문을 일으킨 일본의 중학생용 역사교과서가 바로 이런 논리에서 탄생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가 17일 일본 민주당을 '자학주의'라며 거세게 비판했다. 민주당은 중국 선양(瀋陽) 일본 총영사관의 탈북자 사건과 관련해 선양에서 자체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중국 경찰이 총영사관 영내에 들어간 여성 두명과 어린이 한명을 밖으로 끌어낸 후 2년 이상 개인적 친분관계를 맺어온 총영사관 부영사와 중국 경찰 책임자가 사이좋게 악수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 직후 중국 경찰이 영내에 다시 들어가 다른 탈북자 두명을 연행한 사실도 밝혀냈다. 외무성 자체 조사 보고서에는 들어있지 않은 내용들이다.

이에 대해 고이즈미 총리는 17일 "중국과 중요한 교섭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전혀 고려치 않고 일본측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자학주의다"라고 비난했다. 가뜩이나 일본 외교의 이중성이 드러나 궁지에 몰린 고이즈미 총리로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인 야당측 조사단의 '일격'이 뼈아팠을 것이다.

오죽하면 "민주당 조사단은 중국이 그렇게 좋은가"라고 비아냥 섞인 말까지 했을까. 그의 말을 뒤집어보면 "필요에 따라선 진실을 은폐해도 된다"는 게 고이즈미 총리의 속생각인 것 같다.

그의 이런 의식은 이미 일본 내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는 이번 정기국회에 언론의 취재·보도를 규제하는 내용을 담은 2개 법안을 제출해 놓고 있다. 언론계는 "헌법이 보장한 언론자유를 침해한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최고통치자가 진실을 왜곡하고 언로(言路)를 막으려고 해도 진실은 결국 드러나며, 불행해지는 것은 통치자 자신과 국가·사회라는 것은 역사가 보여주는 진리다. 이 평범한 진리를 되새겨 볼 것을 고이즈미 총리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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