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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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왜 올해는 탑(塔)을 세웠을까. 매년 '부처님 오신날'이면 연꽃·코끼리·용과 같이 상징적인 동·식물 모양의 연등을 만들어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설치했다. 그런데 올해엔 황룡사 9층탑 모양의 대형 풍선으로 대신했다.

황룡사탑을 오늘 다시 세운 뜻은 1천3백66년 전 신라인들이 탑을 만들었던 마음과 일맥상통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탑은 당(唐)나라에서 유학하고 온 자장(慈藏)스님이 제안해 만들었다. 유학생 자장은 연못가를 거닐다 신인(神人)을 만났다. '황룡사를 지키는 황룡(黃龍)의 아버지'라는 신인은 신라의 환란 극복과 태평성대를 고민하던 스님에게 "9층탑을 세우면 된다"고 처방해줬다. 신라왕실의 수호신 격인 황룡의 힘을 빌려보라는 것이다. 이처럼 황룡사탑엔 국운융성의 염원이 담겨 있다.

자장의 건의를 받아들인 선덕여왕의 정치적 의도 역시 국운 융성이다. 처음으로 여자가 왕위에 오르자 사방의 적들이 신라를 가벼이 여겨 침입해 왔는데, 남자 못지 않은 여걸(傑)로 알려진 선덕여왕은 자신의 기개와 나라의 역량을 한꺼번에 과시하고 싶은 마음을 탑에 담았다.

그같은 국민적 염원과 여왕의 정치적 야심을 함께 담았기에 황룡사탑은 그 규모나 아름다움에서 모두 놀랄 정도였다. 백제의 명장(名匠) 아비지(阿非知)를 초빙해 3년에 걸쳐 만들었는데, 높이가 80.18m(20층 건물 높이)나 되는 초대형인 데도 목탑이라 조각이나 단청이 화려하고 섬세했다고 한다.

탑을 완공하고 23년 뒤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다. 국운의 영고성쇠(榮枯盛衰)가 9층탑의 영험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불교가 매우 번창했던 당시 불탑의 형식을 빌려 온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 것은 삼국통일에 일조한 지혜임에 분명하다.

시청 앞 황룡사탑은 높이 25m짜리 풍선에 불과하다. 진짜 황룡사탑의 장엄미(莊嚴美)에 비할 수 없다. 진짜라면 옆의 플라자호텔과 같은 높이며, 그 아름다움은 남대문이 부끄러워 할 정도일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담은 기원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평화통일과 월드컵 성공 기원. 이번 부처님 오신날(19일)엔 황룡이 꿈틀거려 보려나…. 불자는 아니지만 시청 앞을 지날 때마다 마음은 탑돌이를 한다.

오병상 문화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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