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블랙홀'에 산업空洞化 우려 : 商議, 220개 제조업체 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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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0년 전에 일부 생산거점을 중국으로 옮겼더니 생산비가 확 줄었다. 품질도 국내 제품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었다." 의류제조업체 A사 관계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옮길 계획"이라고 밝혔다.

중소기업인 피혁업체 P사는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이전하기 위해 중국당국과 협상 중이다. "생산비용을 줄이기 위해 올해를 생산공장 중국 이전의 원년으로 삼기로 했다"는 것이 회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국내 제조업체들이 외국으로 몰려나가고 있다. 국내 기업 10개 중 7개 정도는 앞으로 3~5년 사이에 생산기지를 외국으로 옮길 계획인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국내 대·중소기업 2백20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절반 정도가 생산기지의 해외 이전 가속화로 4~5년 안에는 국내에 제조업 공동화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했다.

5~10년 후 제조업 공동화가 예상된다는 답변도 40%가 넘었다. LG경제연구원도 얼마 전 "5년 후인 2007년께 제조업 공동화가 우려된다"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실제로 지난해 후반부터 내수경기가 급속히 좋아지는데도 국내 설비투자는 멈춰 있고, 대신 해외투자는 26억달러로 2배나 급증했다.

◇"너도 나도 중국으로"=상의 조사 결과 생산기지 해외이전을 계획 중인 업체(67.5%) 중 절반 정도는 이미 외국에 생산기지를 옮기고도 추가로 이전할 계획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역은 중국(81%)이다. 절반 이상의 제조업체가 공장을 중국으로 이전하겠다는 얘기다.

어느 수준까지 옮기겠느냐는 질문에 절반 정도(48.5%)가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까지 옮기고, 연구개발 등 핵심부문까지 옮기겠다는 기업도 8.6%였다.

실제로 산업 핵심부문의 이전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LG는 아예 상반기 중 중국 베이징(北京)에 전자부문 종합연구소를 설립할 계획이다. 핵심부품의 연구·개발(R&D)기지를 중국에도 두겠다는 것이다.

단순 조립라인의 이전을 위해 해외에 진출했던 기업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핵심부문이 모두 이전해 가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1989년 국내기업 최초로 중국에 진출한 텐트기업 진웅은 서울 본사에서 맡고 있던 연구·개발·디자인·마케팅부문을 대부분 중국으로 이전했다.

진웅 중국법인 성하봉 사장은 "가격경쟁 때문에 한국산 원자재나 디자인을 사올 수가 없다"며 "시간이 갈수록 현지기업화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고 말했다.

생산기지의 해외이전이 단순 조립이나 저가품생산이 아닌 핵심부문까지 확산돼 간다는 점에서 산업공동화가 현실화될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훨씬 싸게 만들 수 있다"=중국 톈진(天津)에 공장이 있는 Y사는 중국공장의 차입금리는 평균 4.7%인데 국내공장이 쓰는 금리는 10.8%로 2배 이상이라고 밝혔다.

상하이(上海)에 공장이 있는 식품업체 D사의 한 관계자는 "중국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데 필요한 서류는 세 가지에 불과했지만 한국은 평균 일곱개 이상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중국은 이제 단순히 임금만 싼 나라가 아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외국기업들이 사업하기에 편리한 환경을 조성하면서 규제도 많고 임금도 비싼 한국보다 중국을 선택하는 기업이 늘고 있는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한국과 중국에 사업장을 가진 44개 대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이 중국보다 ▶산업현장의 체감금리는 평균 2%포인트▶법인세율은 3.2%포인트▶임금수준은 8배▶공장분양가는 4배▶물류비는 1.9배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경련 이인렬 상무는 "한국의 고비용구조와 많은 규제가 제조업의 해외이전을 부추기고 있다"고 말했다.

◇신(新)산업 못 찾는 게 문제=전문가들은 뾰족한 '공동화 대책'이 없다고 말한다. 국내시장은 포화상태고, 중국에서 생산하는게 훨씬 값싸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 등 선진국들도 다 공동화 경험이 있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만달러를 넘으면 공동화가 시작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LG경제연구원 정일재 상무는 "공장 이전이 문제가 아니라 집중 육성할 만한 신(新)산업을 아직 못 찾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한다.

삼성경제연구소 윤종언 상무도 "수종(樹種)산업을 빨리 찾아 자본·지식집약적인 선진국형 산업구조로 서둘러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턱대고 이전하는 경향에 대한 우려도 있다.무역협회 양평섭 연구위원은 "중국은 WTO 가입 후에도 현지 부품 사용을 요구하는 등 애로점도 많다"고 지적했다.

김영욱·양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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