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설치작가 서도호씨 런던서 개인전 세계문화 떠도는'유목민적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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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전시실로 들어선 관람객들은 발 밑을 살펴보고서야 자신이 이미 작품과 하나가 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플라스틱 인형 12만개가 떠받치고있는 25㎡ 넓이의 유리판 위에 서있는 것이다. 영국의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다는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26일까지)재미 작가 서도호(徐都濩·40)씨의 설치작품 '바닥'이다.

그렇다고 황망히 내려올 필요는 없다. 그것이 작가의 의도니까. 무거운 유리판과 관람객의 무게를 견딜 만큼 촘촘히 늘어놓은 인형들은 개인적 공간을 희생한 전체 공간의 상징이다.

그 위의 '나'들을 밟고 서있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같은 공간, 즉 부분과 전체는 서도호가 천착해온 주제다. 20대 후반 미국으로 건너가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본질적 의문에 직면한 탓일까.

"글쎄요. 마치 다른 사람의 몸 속에 들어가 사는 느낌이랄까요. 마음은 그대로인데 몸은 새로 지급받은 것 같았죠. 그때부터 주위에 있는 사물들의 치수를 재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서도호는 그가 태어나 자라온 서울의 집을 미국으로 옮겨올 궁리를 한다. 그래서 탄생한 작품이 '서울집/LA집/뉴욕집/볼티모어집/런던집/시애틀집'이다.

부친인 원로 화가 서세옥 화백이 살고 있는, 서울에서 가장 잘 보존된 전통 한옥으로 유명한 집을 한복 소재인 옥색 은조사로 재단해 여행가방 두개에 넣어 가져왔다. 천장에 끈으로 매달아 천막처럼 늘어뜨리는 이 작품을 한복 소재로 만든 데도 이유가 있다.

"개인의 가장 작고 사적인 공간인 옷의 의미를 확대해 집으로 만들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 집은 그러나 불완전한 집이다. 과거만 있을 뿐 현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작품 '뉴욕 웨스트 22 스트리트, 348번지'를 만들었다. 그가 지금 살고 있는 뉴욕의 아파트를 역시 회색 은조사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여기에 분홍색 천으로 만든 '복도'를 보탰다. 쉽게 상상할 수 있듯 이 작품들은 끝이 없는 작업이다. 그는 이같은 사적 공간들을 하나로 모은 '완전한 집'을 구상 중이다.

이밖에 60벌의 교복을 하나로 연결한 '교복'과 고교 졸업앨범을 이어 벽지로 만든 '우리는 누구인가' 등 그의 작품은 모두 부분과 전체를 잇는 공간을 서정적이고 밀도있는 조형언어로 표현한다.

이는 서울대 서양화과 졸업 후 동양화로 석사를 받고,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에서 회화로 학사, 예일대에서 조소로 석사학위를 받은 그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군번 인식표 10만개를 비늘처럼 엮어 하나의 갑옷(군복 야전상의 내피)을 만든 작품 '섬/원(some/one)'으로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주목받은 뒤 그는 무척 바쁜 작가가 됐다.

이번달 스웨덴에서의 야외설치전, 시드니 비엔날레 그리고 파리 전시 등으로 1년 중 3분의 1은 해외생활을 하고 있다. 세계화된 사회 속에서 이 문화 저 문화를 떠돌아다니는 현대 유목민들의 삶이 그의 작품에 담겨있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할지도 모른다.

파리=이훈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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