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속 빛과 그늘의 모순 편안히 공존하는 게 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지난 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제 14회 정지용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올해는 지용 탄생 1백년인 데다 김지하(61)시인이 이 상을 수상해 화제가 됐다. 특히 김시인이 이날 3백여명의 참가자 앞에서 강연한 수상소감은 국민시인인 지용의 시세계 분석을 통해 자신의 시 인생을 감동적으로 정리해 좌중의 박수를 받았다. 한국 시사(詩史)에 뜻깊을 이번 수상소감을 요약해 정리한다.

편집자

이번에 정지용 문학상 수상 소식을 전해들으며 '나같은 대중시인에게 지용 선생같은 아주 까마득한 높은 봉우리에 계신 분의 감성, 혹은 영성과 이성이 연속될 수 있겠는가'해서 놀랐습니다. 더 크게 놀란 것은 상금이 없다는 겁니다. 도대체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상금이 없는 상을 십 몇 회까지 끌고 나가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고요.

세번째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떠오르는 생각에 적이 놀랐습니다. 제가 싸움닭으로 알려져 있는데, 얼마 전부터는 좀 더 깊은 곳을 보고, 넓게 보고, 좀 쉽게 보자 이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 때 제가 잡은 미학적 테마라던가 시학적 명제가 지용 선생의 '흰 그늘'이었습니다.

흰 빛과 그늘은 상호모순됩니다. 하나의 그늘이란 신산고초와 고통스런 삶을 말하고, 흰 빛은 대개 경건하고 신성한 초월성을 말합니다. 이 두 개의 모순된 명제가 서로 만나는 것이 가능할까, 이러면서 제가 고교 때부터 많이 읽고 존경해 왔던 지용 선생의 시 '백록담'을 떠올렸습니다. 아마도 흰 그늘의 테마가 관통하는 유일한 시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와 같은 높은 봉우리에 제 시학적 명제가 연속된다는 것은 큰 두려움이면서 동시에 영광입니다. 그래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늘이란 우리나라 판소리를 중심으로 무용에까지도 통용되는 미학적 원리입니다. 아무리 판소리를 잘해도 "저사람 소리엔 그늘이 없어" 그러면 그 사람은 끝납니다. 그늘이란 두 가지, 즉 삶의 윤리적 측면에선 신산고초를 무한히 받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려 애를 쓴 성실한 인생의 흔적이고, 미학적·예술적으로는 목에서 몇 사발의 피가 터져나오는 지독한 독공수련의 결과입니다.

윤리적 삶과 미학적 삶이 일치해야 한다고 선조들은 얘기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흰빛과 결합하지 않는 고통의 자취는 예술로서 크게 성공할 수 없습니다. 10년 전 저는 정신의 어둠을 겪었습니다. 2년 전 여름철엔가 율려학회 세미나를 앞두고 대낮에 잠깐 조는 동안에 어떤 영적인 현상이 있었습니다. 계시라 할 수는 없지만 환영처럼 '흰그늘'이란 글자가 보였고 한자로 '백암'(白闇), 영어로 '화이트 섀도'(white shadow)였습니다.

그 뒤로 이것이 율려의 핵심적인 문제고 우리나라 풍류전통에 있어 가장 중요한 미학적 특징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즉 고통 속에서 성실하게 몸을 밀칠 때 내부에서 움직이는 무늬가 나오는 것 아닐까, 통합이 가능한 것 아닐까. 미학적 통합이며 내 삶의 윤리적 통합이자 정신병의 극복이었습니다.

그런 나에게 있어 정지용 선생은 우뚝한 분이었습니다. 그 분의 시세계는,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세가지로 분열돼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톨리시즘, 하나는 모더니즘, 하나는 향토적 서정이랄까 크게 보아 민족주의입니다. 이 세가지로 분열되어 혼거하고 있는 양상이었습니다. 대학에 들어와 읽어봐도 그 혼란은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그 혼란이 부닥쳐 갈등하지 않고 어떻게 이렇게 편안하게 공존할 수 있는가가 큰 의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가면서 그것이 온전한 인간, 특히 훌륭한 시인에겐 반드시 있어야 할 세 가지 측면임을 느끼게 됐습니다. 감성과 이성과 영성의 표현. 가톨리시즘은 영성을, 모더니즘은 이성을, 향토색 짙은 민족주의는 감성을 뜻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세가지 분열이 갈등하거나 작위적 노력없이 한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는가. 이건 아무도 못따라갑니다.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지용 선생의 '백록담'에 못따라갈 겁니다.

그저 저는 대중시인으로서 구수하고 못난 듯하고 어수룩하게 쓰지 않으면 시가 안된다는 짧은 미학적 안목만 가졌던 사람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많이 나고 배고프면서도 시를 쓰고 시집이 몇 천부씩 팔리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부디 이 '흰 그늘'이 저만이 아니라 앞으로 나올 젊은 시인과 이 많은 시인들에게도 준거가 됐으면 합니다. 지용 시인의 흰 그늘과 흰 빛과 컴컴한 고통, 이 미묘한 삼자결합의 세계를 연구하셨으면 합니다.

정리=우상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