左派의 고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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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근의 노무현 현상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이념이 정당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아직도 한국 유권자 대다수의 투표행태는 이념보다 지역에 따라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보아야겠지만, 과거에 비하면 이념과 사회계층이라는 변수의 역할이 많이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 냉전시대에는 분단상황 때문에 '좌익''진보''사회주의'등 일련의 용어부터 사실상 사용이 금지된 상태였으며 그런 환경에서 어느 정당이 진보적 이념을 내세워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한다는 것은 정치적 자해행위에 속한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최근의 노무현 현상을 보면 한국 사회, 특히 젊은 세대는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따라 과거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돼 보다 자유로운 정치적 경쟁이 가능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한국에서도 좌익(진보적) 정당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을까?

냉전적 제약이 없어도 좌파정당의 역할이 간단하지 않은 것은 최근 유럽 좌파정당들의 경험에서 알 수 있다.

1990년대에는 좌파정당들이 영국·프랑스·이탈리아·독일 등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정권을 장악하는 사태가 일어났는데 당시 좌파정당들의 선거전략은 과거의 낭만적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는 온건 중도노선을 택하는 실용주의 전략이었다. 사회주의 정당의 실용주의 전략을 '제3의 길'이라고도 하는데 유럽의 좌파세력들은 앞으로 영구집권을 보장받기라도 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좌파의 중도온건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유럽의 좌익 정당들은 정권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는데 이미 스페인·이탈리아·덴마크·포르투갈 등에서 좌익정권이 무너졌고 최근에는 프랑스의 조스팽 총리가 대통령선거 1차 투표에서 참패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곧 네덜란드에서도 사회주의 정권이 패배할 것으로 보이고 독일은 이미 작센―안할트 주 선거에서 사민당이 참패했는데 다가오는 9월 독일 연방 총선에서도 사민당은 정권을 내놓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 좌파 정당들이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은 확실하다.90년대에 사회주의자들에게 정치적 승리를 안겨주었던 실용주의적 온건 중도 사회주의라는 공식도 이제는 유럽의 유권자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왜 그렇게 됐을까?

오늘날 유럽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은 사회주의자들이 온건 중도노선을 채택하면서 유럽 좌파의 본질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었던 사회주의 자체를 포기하고 정체성 없는 기회주의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정당이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나면 보수주의 정당과 차별화하기가 어렵게 되고 유권자는 사회주의 정당에 표를 던져줄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더욱 심각한 고민은 그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인다고 선언했을 때 유권자들은 그들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아니면 선거전략의 하나로 사회주의 이념을 위장하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 좌파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경우에도 그것은 세계화와 시장경제의 불가피성 때문에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이지, 보수주의자처럼 진심으로 시장경제를 선호해서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는 의심이 계속 남는다.

결국은 사회주의 정당은 영원히 중도노선만을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온건 중도노선을 선언하는 순간부터 좌파 정당들은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됐고 근본적으로는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유럽의 경험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지금 이념에 기초한 정당을 지향하면서도 실용주의적 온건 중도노선을 내세우는 진보세력은 유럽 좌파처럼 결국에는 자기 모순을 피할 수 없게 되고, 유권자들이 그들의 이념적 정체성을 의심하게 돼 현실정치에서도 패배할 수 있다는 점을 더 늦기 전에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회과학원 원장·고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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