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NHK 회장의 세번째 사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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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일본에서는 기업이나 조직의 최고 책임자가 공개 사죄하는 일이 일종의 사회 관습처럼 돼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본인들이 좀처럼 타인에게 보이기를 꺼리는 눈물을 펑펑 쏟아붓기도 한다.

하지만 때론 이 같은 공개 사죄가 면죄부를 발급받기 위한 통과의례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줄 때도 있다. 사죄하는 것과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뜻이다. 거듭된 사죄에도 불구하고 과거사 청산이 미흡한 것도 반성을 동반하지 않는 사죄가 용인되는 문화에서 원인을 찾는 사람도 있다.

일본 공영방송 NHK의 에비사와 가쓰지(海老澤勝二)회장의 경우도 그런 혐의가 짙다. 그는 19일 밤 특별 생방송을 통해 직원들의 비리에 대해 또 한번 시청자들에게 사죄했다. 지난 4일에 이어 두번째고 국회 출석까지 포함하면 같은 사안으로 세번째 사죄한 것이다. 하지만 시청자들의 신뢰를 되찾기엔 여전히 미흡하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에비사와 회장은 이날 오후 9시 'NHK에 바란다'에 출연해 "시청자들의 신뢰를 배반한 데 대해 깊은 사죄를 드린다"며 지배구조 개선 조치를 약속했다. 하지만 노조.시청자 단체로부터 요구받고 있는 자신의 진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 사퇴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2시간15분간의 생방송 도중 전화.팩스.e-메일 등으로 접수된 시청자들의 항의는 9100건에 이르렀다. 에비사와 회장의 사죄는 잇따라 발각된 NHK 직원들의 비리 때문이다. 엉터리 작가 수당을 지급한 쇼 담당 프로듀서가 경찰에 체포된 것을 비롯해 10여년간에 걸친 제작비와 취재비 유용, 가짜 출장비 타내기, 허위 감사 등 10여건의 비리가 최근 몇 달새 잇따라 터져 나왔다. 이 같은 사례들은 NHK에 매월 1400엔의 수신료를 내는 시청자들의 분노를 촉발시켜 지난달의 경우 11만3000가구가 수신료 납부를 거부했다.

때마침 일본에서는 한 기업에서 고객의 고충처리를 20여년간 담당했던 사람이 터득한 사죄의 노하우를 담은 '사장 나와'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사죄가 그 진의와는 별개로 일본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문화의 한 부분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예영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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