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르펜" 130만명 좌파 시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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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노동절인 1일 프랑스 좌파가 모처럼 얼굴을 폈다. 지난달 대선 1차투표에서 극우파 정당인 국민전선(FN)에 패배하는 치욕을 겪은 뒤 열흘 만이다.

그들은 이날 프랑스를 뒤덮은 장 마리 르펜 FN 당수에 대한 반대 물결 속에서 좌파 재건의 희망을 찾는 듯했다. 파리를 비롯한 전국 1백15개 도시에서 1백30만명 이상의 학생·시민·노조원·시민단체 회원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전통적인 노동절 행진 대신 반(反)르펜 구호를 외쳤다. 문자 그대로 FN에 대항하는 범국민적 '국민전선'이 형성된 모습이었다.

프랑스 좌파는 5일 결선투표에서 르펜과 맞붙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우파 진영보다 반 르펜 시위에 더 열성이었다. 6월 총선에서 설욕하기 위해서는 르펜 돌풍을 잠재워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총서기,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시장, 마틴 오브리 릴 시장, 노엘 마메르 전 녹색당 대선후보 등 대부분의 좌파 지도자들이 거리에 나섰다. 정계은퇴를 선언한 리오넬 조스팽 총리만 빠졌다.

우파 쪽에서는 거의 참가하지 않은 이날 시위에서 이들은 좌파 재건의 불씨를 살리려 애썼다. 차기 총리감으로 거론되는 오브리 시장은 "좌파는 우파보다 오히려 더 건재하다"고 역설했다. 마메르 후보도 "극우파 바이러스는 르펜이 패배한다고 박멸되는 것이 아니다"며 총선에서의 좌파 지지를 호소했다.

유례 없는 규모임에도 평화롭게 치러진 이날 시위는 프랑스 좌파를 고무하기에 충분했다. 좌파의 패배 원인 중 하나인 정치적 무관심에서 프랑스 시민들이 깨어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FN 지지자들은 이날 르펜 옹호 시위를 벌였다. 유럽 다른 나라의 극우파들까지 프랑스에 원정, 가세했지만 1만명 정도를 동원하는 데 그쳤다."르펜을 대통령으로"라는 구호가 "르펜은 안돼"라는 함성에 묻혀버렸음은 물론이다.

프랑스 좌파는 극우파의 발호를 막는 것만이 전통적인 좌우 대결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그것은 우파의 이해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좌·우파와 극우파가 삼각구도를 이루는 것은 그들에게도 악몽이다. 르펜 돌풍에 충격을 받은 프랑스 시민들이 대선 결선투표와 총선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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