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있는아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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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누나 하고 부르면

내 가슴 속에

붉은 풍금새 한마리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린다

풍금 뚜껑을 열자

건반이 하나도 없다

칠흑의 나무 궤짝에

나물 뜯던 부엌칼과

생솔 아궁이와 동화전자 주식회사

야근부에 찍던 목도장,

그 붉은 눈알이 떠 있다

언 걸레를 비틀던

굽은 손가락이

무너진 건반으로 쌓여 있다

누나 하고 부르면

내 가슴 속, 사방공사를 마친 겨울산에서

붉은 새 한마리

풍금을 이고 내려온다

-이정록(1964~ ) '붉은 풍금새'

누나! 하고 부르면 금방이라도 풍금같은 소리를 낼 것 같은 누나. 누나를 생각하면 어떤 슬픔같은 것이 어린 맘을 저미고 지나간다. 붉은 댕기 누나의 환생일까. 붉은 풍금새 한마리 가슴 속에서 오래 운다.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며 우릴 놀래키던 그가 제비꽃 여인숙을 차려 특실 한 칸을 영구 분양해 주겠다며 또 한번 우릴 놀래킨다. 이 젊고 유능한 시인이 어떻게 가슴 속 사방공사를 마쳤을까. 날마다 바뀌는 이 세상에서.

천양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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