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기관 개입'새 뇌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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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민주당 설훈 의원의 23일 발언이 정치권에 파란을 예고하고 있다. 최규선(구속) 미래도시환경대표와 한나라당 윤여준(尹汝雋)의원간 대화가 녹음됐다는 테이프의 공개와 관련, 薛의원은 "테이프를 확보하지 못한 채 의혹을 폭로한 것은 내가 경솔했다"고 말했다.

薛의원 스스로 테이프 공개가 사실상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 셈이다.

한나라당은 즉각 "薛의원을 구속수사하라"고 공격했다. "이회창 전 총재의 2억5천만원 수수설이야말로 공작정치의 전형"이라고 격분했다.

薛의원은 "안되면 증인이라도 내세우겠다"고 말했지만 '민주당 수세, 한나라당 공세 전환'이란 흐름을 바꾸어놓긴 쉽지 않을 것 같다.

물증 제시를 못할 경우 가장 타격을 받을 쪽은 薛의원이다. 정치인으로서의 신뢰도와 도덕성에 치명상을 받게 된다. 이미 '의원직 사퇴'로 배수진을 친 尹의원은 "(薛의원이)의원직을 사퇴하지 않으면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압박했다. 민주당 역시 저질 폭로정치를 한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게다가 薛의원 발언을 둘러싼 진위(眞僞)공방은 정보의 출처와 폭로 배후에 대한 논란으로 비화되고 있다.

출처가 '제보'라는 薛의원의 주장은 증거를 내놓지 못함으로써 설득력을 잃었다.

반면 "테이프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엄청난 내용을 폭로할 수 있었던 것은 검찰·국정원·청와대 같은 권력·정보기관이 뒤에 있다는 의미"라는 한나라당의 주장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만약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정보기관들이 정치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구체적으로 제기될 경우 메가톤급 폭발력을 갖게될 전망이다.

당장 한나라당은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 비리 의혹을 걸어 대규모 장외집회를 계획하고 있다. 또 그 여세를 몰아 '정권 퇴진운동'으로 옮겨갈 태세다.

薛의원 파문은 대선 판도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 같다. 민주당은 '잘 나가는 노무현(武鉉)돌풍에 불똥이 번질까' 걱정이다. 당직자들 사이에선 "민주당이 도덕성 시비에 휘말릴 경우 모처럼 기선을 잡은 분위기가 흐트러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하다.

고위 당직자는 "누구에게 내놔라, 말라 할 게 아니라 검찰에서 철저하게 시비를 가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薛의원 해명'에서 '검찰 수사'쪽으로 슬쩍 발을 빼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정치적 사건을 검찰로 떠넘겨 법적 공방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 "시간끌기"라고 반발하고 있어 격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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