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결단 내릴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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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김대중 대통령은 왜 침묵하고 있는가. 아들들의 권력 부패 의혹이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고, 청와대는 탈선의 요지경으로 치닫고 있는 데도 대통령은 입을 닫고 있다. 권력 핵심부가 국민의 조롱거리 대상인 심각한 위기 상황인 데도 金대통령의 대응 자세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런 침묵을 놓고 국민은 처음엔 자식 문제로 겪는 번민과 침통 탓으로 짐작해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침묵이 계속되면서 그런 감정들은 급속히 분노와 탄식·걱정으로 바뀌고 있다."金대통령이 민심 흐름을 외면하는가"라는, 무시당했다는 생각과 이러고도 남은 임기를 제대로 수행할 위기 관리 능력이 있는가, 건강은 어떠한가 등 깊은 의문이 번지기 때문이다.

국민은 바닥 모를 청와대 비서실의 추락에 분통을 터뜨린다.'최규선씨 해외 밀항 권유설' 등 홍걸씨의 보호막을 치기 위해 청와대가 조직적으로 나섰다는 의혹에 사정·민정·정무·해외언론 비서관이 줄줄이 걸려있다. 대통령을 수행했던 행정관이 대통령 동향을 돈을 받고 崔씨에게 알려줬다는 혐의에 국민은 벌린 입을 닫지 못한다.'DJ정권 핵심들'의 공직 의식이 이런 수준인가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청와대 비서실의 이런 난맥상은 정권 사상 유례없는 권력 동맥경화 현상이다.

과거 이런 종류의 사건이 터졌을 때 야당 시절 金대통령의 입장은 단호했다. YS정권 시절의 아들 현철씨 사건, 일해재단 의혹 때마다 金대통령은 권력 타락이라며 험악하게 몰아붙였다. 그렇지만 일해재단에는 아태재단의 이수동씨만큼 턱없는 위세를 부린 인물이 없었고, 현철씨 비리에도 崔씨만큼 요령 넘치는 권력 타기나 정권 전체가 매달리는 듯한 조직적 비호설은 없었다. 때문에 金대통령의 침묵은 미적거림으로 비춰지고 친인척·주변 관리가 '상대에게는 냉혹, 자신한테는 관대'라는 인식을 여론에 심어주고 있다.

국민은 '형님, 동생'하는 패거리식 권력 나누기, 권력 브로커들의 호가호위(狐假虎威), 조폭의 그림자, 권력과 벤처의 수상한 결탁 등 세 아들 주변에서 넘쳐나는 의혹과 부패에 대한 金대통령의 진솔한 판단과 입장을 들으려고 한다. 홍걸씨를 귀국시켜 조사하고 숱한 의문 투성이를 파헤쳐야 하는데, 거기에 필요한 부정(父情)과의 결별 의지가 金대통령에게 있는지를 민심은 확인하려고 한다. 청와대와 여당은 야당과의 진흙탕 싸움 속으로 그런 여론이 휩쓸리기를 기대해선 안될 것이다. 결자해지(結者解之)입장에서 대통령이 임기 내에 끝을 내야 한다. 金대통령이 침묵을 깨고 결단을 내릴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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