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 이제 그만… 盤上지존 꿈꾼다 바둑짱! 박영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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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세계바둑계에서 박영훈(17·사진)이란 이름이 슬그머니 솟아오르고 있다. 한국바둑 하면 세계를 휩쓴 철벽 3강(조훈현9단·이창호9단·유창혁9단)이 먼저 떠오르고 그 다음 자연스럽게 이세돌3단이란 대형 신인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프로에 입문한 지 겨우 2년5개월 된 박영훈3단이 단체전인 '아시아 컵' 우승에 이어 지난주 중국의 상위 랭커들을 연파하고 후지쓰배 세계대회 8강에 오르면서 이들의 반열에 끼어들려 하고 있다. 어제까지 '어린 왕자'로 불린 소년기사 박영훈이 어린 티를 벗고 강자의 이미지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

2001년도 신인상 수상자인 박영훈은 실리 감각과 깊은 수읽기가 뛰어난 기사다. 올해 도요타·덴소배와 아시아컵, 그리고 후지쓰배 등 3개 세계대회에서 연속 한국대표로 출전했다. 지난해 박카스배 천원전에서 우승한 덕분에 '타이틀보유자는 대표선수로 우선 선발한다'는 한국기원 규정에 따라 행운을 잡게 된 것이다.

처음 출전한 도요타·덴소배에서 박3단은 일본의 신예 야마시타 게이고(山下敬吾)8단에게 져 첫판에 탈락했다.

"그때는 굉장히 속이 상했어요. 한국기사들이 다 이겼는데 나만 졌거든요. 이번엔 꼭 이겨 망신당하지 말아야지 다짐했습니다." 박3단은 당시의 기분을 이렇게 털어놓는다. 곧이어 벌어진 4개국 대항전인 '아시아컵'에선 일본의 혼다 구니히사(本田邦久)9단과 혼인보(本因坊)타이틀 보유자인 왕밍완(王銘琬)9단을 연파해 한국의 전승 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지난주 열린 후지쓰배 세계선수권전에선 중국의 신예강호 후야오위(胡耀宇)6단과 위빈(兪斌)9단을 잇따라 꺾고 8강에 진출했다. 후야오위는 얼마 전 중국리그에서 이창호9단을 꺾어 큰 화제를 낳았던 바로 그 인물. 위빈은 2000년 LG배 우승자다.

이번에 돈도 꽤 벌었겠다고 해봤더니 "한 5천만원쯤 될까요. 후지쓰배는 아직 진행 중이라서요"하며 얼굴을 붉힌다.

사실은 돈 써볼 시간도 없단다. 이날도 대국은 없었지만 가양동 집에서 역촌동의 최규병9단 연구실로 나와 온종일 바둑만 연구하고 있었다.

다음날인 18일엔 LG정유배 본선인데 조 편성을 보니 첫판이 유창혁9단. 이 고비를 넘겨도 조훈현9단 등 최강자들이 우글거린다.

떨리지 않으냐고 했더니 박3단은 오히려 "너무 기분이 좋아요"한다. 박3단은 이창호9단 같은 고수와 대국하게 되면 흥분해서 잠이 안올 지경이 된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고수를 만난다는 것이 그만큼 행복하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박영훈은 아직 승부사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편으론 바로 그 순수한 점이 박영훈의 곧은 성장을 예고해 준다.

지금도 바둑두기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박영훈. 그는 다섯살 때 아버지에게 바둑을 배웠고 그 후부터는 부친이 술에 취해 들어오더라도 늦게까지 기다렸다가 꼭 바둑을 두어야 잠을 잘 정도로 바둑에 심취했다.

올해의 목표를 물었더니 "국내 타이틀을 하나 따는 것입니다"고 대답한다. 국내 타이틀 덕분에 세계대회에 나가게 됐고 그바람에 새 세상을 만난 박영훈으로선 국내 타이틀이야말로 소박하지만 간절한 목표이기도 하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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