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임기 중반, 궤도수정 필요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1994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과 민주당은 처절한 패배를 맛보았다. 바로 2년 전 클린턴은 46세의 젊은 나이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난 첫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었다. 그는 가난한 어머니와 술주정뱅이 의붓아버지 밑에서 고생하며 자랐다는 열등의식과 미국 남부의 작은 아칸소 주지사에서 갑자기 세계 초일류 강대국의 대통령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데 대한 자만심이 넘쳤다. 젊고 미숙한 자신의 약점을 무시하고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사회주의적인 국가의료보험 제도 같은 무리한 개혁정책들을 독불장군처럼 밀어붙이려다 실패했다. 그 결과 민주당은 40년 만에 처음으로 동시에 상.하원의 과반수 의석을 공화당에 뺏기고 말았다.

*** 클린턴 초반 실수 뒤 진로 바꿔

그러자 미국 언론들은 클린턴의 정치 생명이 이미 끝났다고 성급하게 진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클린턴은 그 후 과감하게 통치방향의 궤도수정을 단행해 좌파적 사회주의 정책에서 '제3의 길'이라는 중도 노선으로 회귀, 미 의회 상.하원을 장악한 공화당과 타협하기 시작하고 사회보장제도 개혁 등 어려운 일들을 성취시켰다. 그 결과 2년 뒤인 96년에 클린턴은 379대159의 압도적인 선거인단 획득으로 2차 대전 당시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이래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한 민주당 대통령이 됐다.

바로 2년 전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의 지금까지 업적은 부분적인 부패억제와 투명성 제고 외에는 대부분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무리한 개혁작업과 편 가르기로 국민 간의 갈등은 점증되고 빈부 격차는 외환위기 수준으로 확대됐으며 폭증하는 청년 실업자와 가계부채로 서민생활은 날로 핍박해져 대통령의 국민 지지도는 20%대에 머물러 있다. 중국.인도 등을 위시해 올해 세계경제는 20년 만의 최대 호황을 누렸으며 만성적인 금융위기에 시달려온 남아메리카까지 25년 만에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나 우리나라 경제성장률만 아시아 주요 경쟁국 중 최하위로 전락했다. 노 대통령의 '연 7% 경제성장률'달성 약속도 YS와 DJ의 '세계 5대 경제 강국론'처럼 이제 국민을 우롱하는 직업 정치가들의 또 하나의 헛된 구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노 대통령을 이미 실패한 대통령으로 포기할 수는 없다. 남은 임기 3년이 너무도 소중한 기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같이 변화가 빠른 나라로선 더욱 그렇다. 노 대통령이 클린턴처럼 과감한 궤도수정으로 남은 임기 3년 동안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모두 기원해야 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협조해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 노 대통령 부터 스스로 변해야 한다.

5년 단임제인 한국 대통령은 첫 2년이 지나면 여러 가지 유혹에 빠지기 쉽다. 당선 직후 1년은 새 대통령으로서의 역할과 청와대 살림에 익숙해지느라 정신없이 지내다 2년째에는 여러 국가 기관들로부터 수많은 고급정보를 받는 까닭에 자기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똑똑하고 많이 아는 것 같은 환상에 빠질 수 있다. 웬만한 국가 원로들이나 유능한 보좌관들의 의견도 '새로울 게 없다'고 폄하하기 쉽다. 또 국가원수 자격으로 잦은 외국 방문 중에 최고의 국빈대우를 받게 되고 세계의 정상들과 1대 1로 대등하게 교류하다 보면 대통령도 인간인 이상 자기가 한국인 중에서 제일 잘나고 뛰어난 것 같은 교만한 마음이 생겨 주위의 비난이 싫어지고 거부감을 갖게 마련이다.

*** 남은 3년 더 겸손하게 봉사를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훌륭한 대통령은 교만과 자신감을 억제하고 보다 겸손한 마음으로 앞으로 남은 3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아울러 대통령이란 자리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한 인간이 가장 크게 봉사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라고 생각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경제를 활성화해 일자리를 늘리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일이다. 클린턴 대통령도 실수와 스캔들에 시달렸지만 그의 임기 중 미국 경제가 연평균 5.2%의 높은 실질성장률을 기록해 8년 동안 경제규모를 50%나 더 크게 해놓은 덕분에 지금까지 많은 국민의 인정을 받고 있다. 경제에 관한 한 책임 총리제를 버리고 국민이 뽑아준 대통령이 직접 앞장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박윤식 조지워싱턴대 교수.국제금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