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로 보는 세상] 留侯論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천하에 큰 용기를 지닌 이는 갑자기 일이 닥쳐도 놀라지 않고, 억울하고 당혹해도 화내지 않는다. 이는 마음에 품은 바가 크고 뜻이 깊기 때문이다’.

송(宋)나라의 대문장가 소동파(蘇東坡)가 유방(劉邦)의 책사인 유후(留侯) 장량(張良)을 논평한 『유후론(留侯論)』의 앞머리다. 추이톈카이(崔天凱)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이 구절을 얼마 전 천안함 사건의 협조를 구하러 방중한 천영우 외교통상부 2차관에게 선물했다.

『유후론』은 이렇게 이어진다. 진시황 암살에 실패한 후 은거하던 장량이 어느 날 다리를 건너다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그가 재간은 충분하나 도량이 부족함을 우려했다. 노인은 신발을 이용해 그의 젊은 혈기를 꺾어, 작은 분노를 참고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든 뒤 병법책을 선물했다. 한편 월왕(越王) 구천(句踐)도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곤욕을 당했음에도 귀국 후 오나라 섬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남에게 보복할 뜻이 있으면서 자신을 낮추지 못한다면, 이는 평범한 사람의 강함일 뿐이다(且夫有報人之志, 而不能下人者, 是匹夫之剛也). 유방이 승리하고 항우가 패배한 까닭은 참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다. 사마천(司馬遷)은 장량의 여인네 같은 모습만 언급하고 기개는 평가하지 않았다. 소동파는 장량이 어리석은 체한 것이 바로 승리의 비결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시를 지어 주고받는 부시(賦詩)는 동양의 외교 전통이다. 우리가 먼저 문자 외교를 못했다면 답사라도 보내야 할 것이다. ‘사나운 새가 공격하려 할 때는 낮게 날며 날개를 거둔다. 사나운 짐승이 덮치려 할 때에는 귀를 드리우고 엎드린다(鷙鳥將擊, 卑飛斂翼. 猛獸將搏, 弭耳俯伏)’. 장량이 노인에게 받았다는 『육도(六韜)』에 나오는 이 구절은 어떨까?

하지만 큰 용기 운운하며 놀라거나 화내지 말라는 것은 이율배반(二律背反)이다. 춘추시대 송(宋)나라 양공(襄公)은 국경을 침범해오는 초(楚)나라 군대를 앞에 두고서도 ‘군자는 전쟁에서 다친 자를 거듭 상하게 하지 않고, 머리털이 반백인 늙은이는 사로잡지 않는 법(君子不重傷, 不禽二毛)’이라며 인의(仁義)만 앞세우다 반격의 기회를 놓쳤다. ‘송양지인(宋襄之仁)’의 어리석음은 피해야 한다. 핵심은 자세가 아니다. 국력이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