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탔던 비행기 추락… 승객도 많다" 中동포 '피투성이' 신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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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내가 탔던 비행기가 추락했다. 사람들이 많이 탔다."

15일 낮 12시쯤 "항공기가 추락한 것 같다"는 주민 신고를 받고 사실 확인에 나섰던 119상황실에 사고기 탑승객의 신고가 접수됐다. 곧이어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경남 김해시 지내동 사고현장 인근 불암파출소로 찾아와 추락 사실을 알렸다.

이 신고로 구조대원들은 산을 헤매지 않고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많은 탑승자들이 목숨을 건졌다.

머리와 다리를 다쳐 피범벅이 된 몸으로 경찰에 추락 사실을 알린 주인공은 중국 옌지(延吉) 출신의 김문학(金文學·34)씨. 부산 동진상선 선원인 金씨는 2년 만에 휴가를 얻어 중국에 거주하는 가족들과 한달간의 달콤한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열심히 번 돈으로 휴가 땐 아내(30)·딸(7)과 함께 난생 처음 베이징시내 호텔에서 묵기도 했다.

공항까지 배웅을 나온 아내는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면 재수가 없다"며 애써 웃어보였다.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고 있는데 "곧 착륙한다"는 기내방송이 나왔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비행기가 배처럼 좌우로 흔들리면서 요동을 쳤다. 순간 정신을 잃었다.

얼마쯤 지났을까.눈을 뜨자 온몸이 쑤셨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기체에 뚫린 구멍으로 빠져나와 무작정 걸었다. 연기와 안개로 방향을 알 수 없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산 꼭대기로 올라가고 있었다. 산 아래로 발길을 돌렸다.

수차례 넘어지며 30분쯤 산길을 내려오니 민가가 보였다. 곧바로 119에 전화를 걸었다.

그래도 안심이 안됐다.회사인 동진상선 김학성(47)선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고 사실을 알렸다.

모두 반신반의하는 눈치기에 안심이 되지 않았다. 택시를 무작정 잡아타고 가장 가까운 경찰서를 찾았다. 피를 흘리며 불암파출소에 들어선 그는 다급하게 "비행기가 추락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오히려 "주민등록증을 보여달라"며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金씨가 추락 정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 파출소 직원들은 현장 확인에 나섰던 경찰관들에게 추락 지점을 알렸다.

김해 성모병원으로 후송돼 치료 중인 金씨는 "기를 쓰고 산을 내려온 것은 비행기에 너무 많은 사람이 탔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병원으로 달려온 동진상선 金선장은 "장기 항해가 끝나면 보통 3~4개월 쉬지만 金씨는 워낙 성실해 휴가를 한달만 달라고 특별히 부탁할 정도"라고 칭찬했다.

金씨뿐 아니라 부상한 생존자들도 자기 몸을 돌보기보다 다른 중상자들을 구하는 데 앞장서 사망자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대구 기린여행사 직원 설익수(25·부산시 반여1동)씨와 부산 JCA여행사 직원 김효수(35·부산시 남산동)씨는 사고 직후 정신을 차린 뒤 10여명을 업거나 안아 사고 현장에서 50여m 떨어진 곳으로 옮기는 등 생존자 구조에 나섰다.

설씨 등은 "동체가 불타고 있어 폭발사고 위험이 커 승객들을 무조건 산 아래로 끌어냈다"고 긴박했던 순간을 전했다. 이들은 생존자를 옮기는 것뿐 아니라 구조대가 올 때까지 중상자들을 보살폈다.

부상자들에게 "잠들면 죽는다"며 잠을 못 자도록 흔들면서 허리띠 등을 이용해 피가 나는 부위를 지혈했다.

그러나 이들은 "'기체 안에 아들이 있다'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아주머니 승객이 있었는데 불길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며 안타까워했다.

119구조대 관계자는 "불길이 계속 번지는 상황에서 이들이 생존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기 때문에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인근 주민들도 팔을 걷고 나섰다.사고 현장 부근 동원아파트 주민과 김해고 학생회장 이상욱(19)군 등 학생 10여명은 비를 맞으며 부상 승객 후송을 도왔다.

사고 현장에서 1㎞쯤 떨어진 섬유업체에서 근무하는 최형관(42)·박영도(43)씨 등은 회사 구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 TV 뉴스를 보고 현장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이들은 비가 내려 혼자 걷기에도 미끄러운 산 비탈을 부상자들을 업고 내려와 구급차로 옮겼다.

김해=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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