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페루·그리스 사람" 다국적 거주제 해볼만 한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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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천둥치는 밤'에 혼자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 온갖 공상에 빠져들던 어린 날을 기억하시는지. 미셀 르미유가 쓴 동화책 속의 여자아이는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나는 누굴까, 나는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을까, 내 몸을 남과 바꿀 순 없을까, 이런 생각은 어디에서 왔을까…'.

천둥이 치지 않아도, 가끔이 아니라 매우 자주, 나는 나 자신을 바꿔보고 싶다. 아침에 옷장을 열어 여러 가지 옷중에 하나를 골라입듯이 각양각색의 얼굴과 육체가 들어있는 벽장에서 기분에 걸맞은 몸을 하나 골라 걸치고 외출할 수 있으면 좋겠다.

바꿔보고 싶은 게 몸뿐이랴. 내 존재의 근거가 되는 모든 것, 가령 나는 조국도 이것저것 고르고 바꿔보고 싶다. 마르고 닳도록 '자랑스러운' 배달겨레의 한국인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자연이 아름다운 태국인도 되어보고 신화가 숨쉬는 그리스인 노릇도 해보고 세상의 끝이라는 페루의 국민, 상상의 범위 바깥에 있는 아프리카 어느 나라 사람으로도 살아보고 싶다.

이 나라는 모든 게 온통 '개판'이요 엉망진창이라는, 유구한 전통의 술자리 망국론에 편승해서 해보는 생각이 아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입만 열면 망해먹을 나라타령을 해대는 바람에 오히려 나는 이 '천민졸부'의 내 나라를 감싸안고 싶은 마음도 든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런 의구심이 스멀스멀 찾아든다. 한 개인의 존재근거가 반드시 특정 국가의 국민으로 귀속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거시적으로 보자면 국가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강요된 틀이 아닌가. 모든 사람이 자국인과 외국인으로 나뉘어 조국에 목숨걸고 충성해야 한다는 '신앙'은 언제 어느 계급이 만든 거더라?

'근대(modern)'라는 이름의 현생 인류 생태계에서 국가제도가 불가피한 것이라면 가령 이런 방법은 어떨까. 일정기간의 의무교육이 있듯이 태어나 일정기간은 모든 국민이 협약을 맺은 다른 나라에 가서 순회 거주하는 것이다. 생육기간이 끝나면 반드시 어미품을 멀리 떠나야만 하는 독수리처럼,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을 향해 뿔뿔이 흩어져 나가는 것을 규범화한다.

물론 어느 거주지에서나 교육받고 취업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아울러 그때그때 현지인과의 '잠정적인' 결혼을 권장한다. 출신을 구별하기 어려운 하이브리드형(혼혈) 인간이 점차 다수가 되어가는 가운데 가족의 개념과 형태는 근본적으로 혁신되어 1인 가정을 기초단위로 한다.

이름하여 '다국가 거주제'다. 따라서 국적도 여러개가 된다. 한국 태생이면 본적제도처럼 제 1국적이 대한민국이고 이후에 거주한 여러 국가들을 제 2국적으로 등재한다.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이 묻는다.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이슈?" "네, 저는 한국·태국·그리스·짐바브웨·프랑스·페루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가 중요하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다. 한데 국적 하나 밝히자고 여러 나라 이름을 주워섬기는 것도 참 번거로운 일이다.

국적이란 국가없는 세상으로 가는 과정상의 편의적이고 잠정적인 수단일 뿐이다. 점차 국가란 공화정 하의 국왕처럼 명목과 권위로서만 존재하고 모든 개인의 귀속처는 거주지 시민사회가 중심에 놓인다.

국가든 가족이든 집단에 소속되는 것을 원치 않는 개인이지만 공공의 편익을 위해, 그리고 개인과 개인을 매개시키는 고리로써 고도로 성숙된 시민사회를 고안해야 한다.

무엇보다 국가제도가 만든 국방의 의무가 환경의 의무로 전면 대체되어야 한다. 국방이 국가를 위한 것이라면, 국가의식이 무용한 성숙한 시민사회에서는 인간과 동식물의 조화로운 삶을 위한 행동강령으로 환경권이 최우선하는 것이다.

아울러 납세·교육·근로 등 '국민의 이름으로' 부여된 의무와 기본권 조항도 거주지 시민사회의 편익을 넘어설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거주지 역시 언제나 이동과 선택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 응집력과 귀속감을 줄 수는 없다. '나'의 궁극적 소재는 개인이며 동시에 인류일 뿐이다. 마침내 한때 주술적 힘을 발휘했던 '국가주의'라는 단어는 고어(古語)나 사어(死語) 사전에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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