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거울 앞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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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를 가 보아라. 그가 오래 머물며 관리하는 공간에는 그만의 독특한 생활질서와 습관이 배어 있다. 그의 글이나 말, 그럴 듯하게 꾸민 얼굴표정과 옷차림은 우리를 속일지라도 그의 '방'은 냄새를 풍기게 마련이다. 아무리 쓸고 닦아도 지울 수 없는 생의 흔적이 숨어 있다 우리의 발길을, 눈길을 붙잡는다. 그래서 언젠가 당신의 방에서 나는 그토록 두리번거렸던 것이다. 그토록 열렬히….

화장품으로 변신 꿈꿨지만

한 여자를 알려면 그 여자의 경대를 보면 된다. 화장대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여자가 아니더라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들다. 시몬 보부아르 같은 유명한 페미니스트도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거울을 보았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여자 친구를 새로 사귈 때 나는 묻는다. 어느 화장품을 쓰세요?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그의 얼굴가죽에 닿는 로션은 어느 집에 사는가에 못지 않게 그의 인생철학을 말해준다. 피부는 옷보다 정직하다. 겉은 화려해도 뜻밖에 수수한 국산품 애용자가 있는가 하면, 안 그럴 것 같은데 화장품만은 고급 브랜드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젊은층일수록 해외명품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게 우리의 현실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도 저도 아닌 짬뽕이다. 국산과 외제, 싸구려와 고급이 마구 섞여 있다. 재작년에 처음 장만한 원목경대 위에 스킨에서 로션·크림·자외선 차단제에 이르기까지 같은 회사제품이 하나도 없다는 걸 발견한 날, 거울 속 여자의 입가엔 어느새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때그때 때우고 메우며 살아온 주인을 닮은 뒤죽박죽 경대가 지겨워 어느날 나는 반란을 도모한다.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여성잡지를 뒤적이고 백화점에 간다. 피부관리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밤새 여성잡지를 고시공부하듯 통독한 눈은 충혈돼 있다. 화장품 종류가 왜 이리 많은지. 같은 회사에서도 여러 계열의 제품을 생산하는 데다 거의 해마다 철마다 신상품을 내놓는다. 우리나라 화장품의 경우 국산티를 안 내려고 프랑스어나 영어로 브랜드 이름이 바뀌어 소비자의 혼란을 부추긴다. 제품의 '질'에 자신이 있다면 브랜드가 곧 상품이므로 이름을 그렇게 자주 바꾸지는 않을텐데, 의심이 들었다. 30개도 넘는 회사에서 영양크림만 서너개씩 생산한다 해도 합하면 1백개도 넘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쇼핑이 내겐 즐거움이 아니라 고역이었다.

물건을 사지도 않고 매장을 구경하는 데만 며칠이 갔다. 주름을 완화시킨다는 크림과 미백 효과가 있다는 화장수를 사며 내가 얼마나 망설였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것이다. 몇 번인가 샀다가 도로 물렸다. 화장품 값이 너무 비싸서. 내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를 하고 돌아온 날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늙는 것 편하게 받아들이자

누런 바셀린 크림 한 통으로 온 식구가 겨울을 났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살을 후벼파 알레르기를 일으켰던가. 황사 때문인가. 눈가와 뺨이 심하게 따끔거리며 가려워 피부과를 찾았다. 화장품을 바꾼 뒤 생긴 가려움증을 호소하는 민감한 환자에게 의사는 모공이 넓다며 코의 박피를 권했다. 이쯤 되면 병원이 아니라 미용실 아닌가.

화장품만 바꾸었지 결국 나는 나를 바꾸는 데 실패하고 병만 얻었다. 한갓 크림으로, 몇 g의 물과 기름으로 잃어버린 젊음을 보상하고자 한 나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참을 수 없는 가려움과 따가움 속에 얻은 교훈 하나. 나이 드는 걸 편하게 받아들이자. 내게 잔인한 달이 된 4월이 어서 지나가고, 모래바람 속을 맨 얼굴로 다녀도 될 만큼 내 피부가 튼튼해지면 좋겠다.

눈가에 잔주름이 늘어나더라도 내가 덜 예민해지고 순하게 늙는 지혜를 터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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