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전원의 봄·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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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柳綠花紅)."

일찍이 생동하는 봄의 풍경을 보고 놀란 시인 소동파의 시구다. 눈은 옆으로, 코는 세로로 달려 있는 것과 같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에 감동하는 시인의 어린애 같은 눈길을 보라.

그런 경이에 찬 눈길이 있어 꽃과 함께 봄은 온다. 올해는 이상고온 탓에 산수유·매화·진달래가 핀 다음에 개나리·목련·살구꽃을 거쳐 복사꽃·벚꽃·배꽃이 피는 그 차례도 없이 그야말로 백화가 한꺼번에 만발이다. 순결함·요염함·우아함·화사함 등의 관을 쓴 저 휘황한 화개(花開) 앞에서 세상에 열리지 않을 마음이 어디 있으랴.

더욱이 가지각색 빛나는 꽃의 색깔을 보라. 차갑기 그지없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마저 "색깔은 철학할 마음을 일으킨다"고 했으니 그 꽃색깔에 환해지는 우리 범인(凡人)들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세계 최고인 샤넬 향수조차 결코 가 닿지 못할 싱그러운 꽃의 향기는 또 어쩌는가.

이런 날 내가 냉이·민들레·꽃다지·제비꽃 등 풀꽃 낱낱에마저 그 이름을 불러주듯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번에 조계종 새 종정에 추대된 법전 스님은 인터뷰에서 "난 꽃은 별로여. 덧없잖아. 대신 소나무를 좋아해. 느티나무도 좋고"라고 했다. 그런데 요즈음 내 고향 농사꾼들은 또 다른 이유로 애써 꽃을 외면한다. "논일 밭일이 태산인데 꽃 쳐다볼 틈이 어디 있어. 화전놀이 꿈은 말 그대로 꿈일 뿐이여."

하기야 벌써 개구리들이 개울마다 암놈 수놈 등에 업고 업히어 감창소리 마구 앓아댄다. 엊그제 비조차 흠뻑 내리니 더 바빠져서 논두렁 쌓고 논물을 가두랴, 검은 그루에 두엄 내고 애벌갈이 하랴, 보리밭 비배관리 하고 하우스 속의 딸기며 토마토 따내고, 또 씨나락 담근 뒤 못자리 설치하랴, 그야말로 촌음을 다툰다.

그러나 힘써 일하다가 담배 한 대참의 우두망찰로라도 밭가의 홍도화에 취하는 일쯤은 왜 없겠는가. 다 늙어 꼬부라진 칠순 노파도 "봄바람에 꽃이 날리는 꿈을 꾸면, 깨어나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하거늘, 하물며 꽃 피고 새 울면 씨뿌리고 사랑하던 사람들이 왜 꽃을 모르겠는가. 비록 덧없는 꽃이지만 덧없는 것이야말로 또 더욱 애절한 게 아니던가.

이럴 때 머위잎·불미나리·냉이무침에다 애기쑥국으로 겨우내 군둥내 났던 입맛을 되살리며 그 꽃 지는 것 바라보라. 그러면 어느새 뒷산엔 연두초록이 마구 번져가고, 동구밖 느티나무는 그 둥근 초록의 광휘로 마을을 감싸리라. 이어 강변의 미루나무는 제 온몸의 금은보석을 짤랑거리며 빛과 바람의 전언(傳言)을 세상에 마구 퍼뜨릴 것이니 또 어찌하랴.

벽암록에 "푸른 바람 두루 불어 다함이 없네(淸風 地有何極)"라는 선어가 있다. 맑고 푸른 바람은 드넓은 대지에 두루 가득하여 어떠한 한정도 차별도 없는 것이니, 절망과 슬픔 중에서도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만 있으면 언제나 진리의 한복판에 있다는 말이겠다. 사실 자기의 수고로운 노동으로 먹을 것 걱정만 없다면 어디서든 천국일 사람들. 그들은 빛과 바람의 전언에 오래 전부터 귀기울여온 것이다. 그러니 올해 또 꽃이 지고 봄날이 간다 한들 어찌하랴.

고재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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