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연극계의 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5면

카페 '떼아뜨르'. 지금은 흔한 이름이 카페지만 아직도 '카페 떼아뜨르'는 없다. 그만큼 1970년대 초 명동의 카페 떼아뜨르는 문화적으로 독보적인 존재였으며 내 인생에서도 도발적인 역할을 했다.

되돌아보면 전후 50~60년대의 경제적 재건기를 거치고 비록 군사정권의 암영 속에서나마 문화의 다양한 흐름이 막 형성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당시 연극계에서도 서구 부조리극이니 우리 전통극의 회복이니 해서 새로운 표현을 모색하고 있었으나 명동 국립극장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극장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의상 디자이너 이병복씨가 사재를 털어 맥주홀을 사들여 카페 겸 소극장으로 고쳐 문을 연 것이다.

당시 카페 떼아뜨르는 신세계백화점에서 명동으로 들어가는 큰 길 초입 오른쪽의 어둑한 작은 골목안에 있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붓자국을 살린 흰 회벽에 드문드문 통나무가 박힌 남구(南歐)풍의 외양으로 꾸며놓았는데 입구에 연극 포스터를 붙이는 작은 유리박스가 있고, 그곳을 레몬빛의 작은 전구가 늘 비추고 있던 기억이 난다.

낮에는 차를 팔고 주말에는 홀 한쪽을 치우고 단막극을 올렸다. 지금도 맹활약 중인 오태석씨의 작품이 많이 올랐고 고 김동훈·함현진, 그리고 탤런트 겸 연극배우인 전무송씨 등이 자주 출연했다.

당시 히피풍의 긴 생머리로 멋을 낸 '퇴폐풍'의 대학 초년생이었던 나는 청춘의 불안한 열정을 이곳에서 달랬다. 문화라는 것이 느낌을 공유하는 데서 출발한다면 이곳에서 어떤 문화적 공감대를 확인했고 나아가 순탄치 않을 내 '인생의 진로'마저 예감할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아직 소박한 삶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서 카페 떼아뜨르는 왠지 별난 사람들이 알아서 스스로 모여드는 그런 몇 안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과연 그곳을 드나들던 사람 중에서 많은 연극인·영화감독·디자이너 들이 나왔다. 그래서 그 평가야 어쨌든 삶을 던져 제 몫을 해왔다.

오늘도 연극을 보기 위해 20대들 틈에 끼어 찢어진 포스터와 무대장치 같은 음식점이 난무하는 대학로를 헤매고 다닌다. 보다 많은 사람이 문화를 담당하고 향유하게 된 이 시대는 물론 행복하다.

그러나 상업주의가 부추기는 황홀한 감각의 홍수 속에서 누구나 강박적으로 소비 이미지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또 그것을 창조적인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 오늘, 카페 떼아뜨르는 분명 '과거의 섬'이다.

김방옥

<연극평론가·동국대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