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제2부 薔薇戰爭 제2장 揚州夢記 : 양주에서의 마지막 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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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그리하여 두목은 양주를 떠나면서 쓴 '회포를 풀다' 라는 뜻의 시'견회(遣懷)'의 '십년의 오랜 세월 한번에 깨니/한갓 양주의 꿈일 뿐/청루에 박정한 사람이란/이름만 남겼구나'라는 내용대로 한갓 양주의 꿈에서 깨어나게 되는 것이다.

'십년의 오랜 세월'이란 2년 남짓의 양주생활을 시인 특유의 감수성으로 과장한 것. 그로부터 2년 뒤 두목이 다시 양주로 찾아와 1년 남짓 머무른 것까지 합한다 할지라도 두목은 두차례에 걸쳐 도합3년 정도 양주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동생 두의도 진사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직사관(直使館)'이 되었으나 이 무렵 안질에 걸려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두의가 요양하여 머무르던 곳이 바로 양주의 선지사(禪智寺). 오늘날에도 그 터가 남아있는 선지사에 머물고 있는 동안 각별히 동생을 사랑하였던 두목은 유명한 안과의 석생(石生)을 낙양에까지 찾아가서 모셔와 함께 양주로 찾아와 간병함으로써 2년 뒤에 또다시 양주를 찾게되는 것이다.

만약 동생이 안질에 걸리지 않아 양주의 선지사에 머무르지 않았다면 두목은 또다시 양주를 찾게 되지 못하였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두목은 『번천문집』에 '장보고와 정년의 열전'을 남기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렇듯 왕정이 가르쳐주었던 풍원규를 만나기 위해서 연수향으로 두목이 찾아간 곳은 두 번째로 양주에 머무르게 되었을 때의 일이고. 어쨌든 이 무렵 두목은 양주를 일단 떠나게 되는 것이다.

훗날 송나라의 호자(胡仔)가 쓴 『초계어은총화후집(苕溪漁隱總話後集)』에 나와있는 내용 그대로 2년 남짓 동안 양주에서 있었던 두목의 퇴폐적인 행동을 일일이 미행·감시하고 이를 통해 경책하였던 상관 우기장(牛奇章)의 충고를 받아들여 양주를 떠날 무렵의 두목은 이미 2년 전 양주에 장서기(掌書記)로 부임해올 때의 두목이 아니었던 것이다.

두목이 양주를 떠날 때 가장 마음에 걸린 사람은 바로 두구화였다.

두목이 일찍이 탄식하였던 대로 '아름답고 예쁨'을 찬사하는 최고의 표현이었던 '빙빙뇨뇨'의 두구화. 이제 겨우 열서너살의 2월초에 피어나는 갓 줄기 두구화와 같은 여인. 그가 쓴 시에 나오는 내용처럼 '봄바람 부는 십리양주길에 모든 청루의 주렴을 걷어올리고 기녀를 빠짐없이 보아도 모두가 그녀만큼은 못하였던 두구화'와 헤어지는 고통은 양주를 떠나는 두목 최대의 슬픔이었던 것이다.

두목이 양주를 떠난 것은 7월.

홍약교 다리 근처에 있는 청루에서 마지막으로 두구화와 더불어 주거니받거니 술을 마시면서 두목은 양주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일찍이 시인 장호(張祜)는 양주의 밤거리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십리장가는 시정거리와 이어지고 월명교(月明橋) 다리 위에서 신선을 보았네"

시인 장호가 양주에서 신선을 보았다면 천재시인 두목은 양주에서 백일몽을 꾸었음이었다. 날이 밝아 양주를 떠난다면 두구화와는 영원한 이별이었다.

두구화와의 이별일 뿐 아니라 술과 장미의 나날과도 영원한 이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두목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밤 깊은 누각 밖 다리 위에서는 누가 부르는 것일까 구슬픈 퉁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새벽이 가까워오자 다 탄 촛불은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치마를 벗기고 두구화의 벗은 알몸 배꼽 위에 술을 붓고 사타구니로 흘러내리는 여근주에 취해있던 두목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두구화에게 물어 말하였다.

"함태화야, 너를 떠나면 이제는 어디서 여근주를 마실 수 있을 것이냐."

그러자 두구화가 대답하였다.

"떠난 듯 돌아오소서 나으리. 소저는 언제든 나으리를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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