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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점령의 마지막 결전 오키나와 전투 막 내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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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미군 잠수함의 어뢰에 맞아 침몰하는 야마토함.

1945년 6월 21일 일본 점령을 위한 최후의 전투였던 오키나와 전투가 미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미군은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여기에 일본 본토 점령을 위한 사령부를 설치하려 했다. 일본의 본섬들과 가까운 오키나와에 공군기지를 설치하면 일본을 공격할 폭격기들이 좀 더 수월하게 출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키나와를 뺏기지 않으려고 저항했다. 이로 인해 오키나와에서는 3개월간 피의 전투가 계속됐다. 이 전투로 일본 측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18만8136명이며, 이 중 오키나와 출신이 12만2228명이었다. 또한 오키나와 전투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도 9만4000명이나 됐다. 미군 역시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1만2520명, 부상자 7만2000명으로 피해가 적지 않았다.

본토 상륙을 막기 위한 일본의 저항은 전투기를 이용한 자살 특공대인 가미카제뿐만 아니라 인간어뢰라고 하는 가이텐 특공대까지 만들어 냈다. 천안함 사건 보도 초기에 추측성 기사로 나와 논란이 됐던 소위 ‘인간어뢰’의 기원이라고 할까?

그런데 최근 일본에서 오키나와 전투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2007년 가을 오키나와에서 주민 10여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한 대규모 시위가 열린 것이다. 이 시위에는 1995년 미 해병의 여학생 성추행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였다. 2007년 3월에 있었던 문부과학성의 의견 때문이었다. 즉 문부과학성은 고교 교과서에 오키나와에서의 ‘집단 자결’을 일본군의 명령, 강제에 의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데 이를 삭제 또는 수정하라는 의견을 냈던 것이다.

집단 자결은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의 공격이 압박해 오자 주민과 가족들이 서로를 죽이면서 발생했다. 당시 생존자들에 따르면 주민들이 동굴 등의 은신처에서 일본군으로부터 받은 수류탄을 터뜨려 자결하거나 서로 목 졸라 살해했는데, 이는 모두 일본군의 명령과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이에 대한 삭제 의견을 내놓은 것이다. 일본군의 명령이 없었다는 것이다. 내용의 진위도 중요하지만, 정부에 의한 역사 서술에의 개입이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발전국가를 경험한 한국 사회 역시 일본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모든 분야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고 효율적인 분야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사회적 통합을 해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역사인식, 서술과 같은 학술적 분야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역사인식의 다양성과 객관성을 침해할 가능성이 더 크다. 일본과 유사한 검정 시스템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발은 결코 강 건너 남의 일이 아닐 것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