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마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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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수찬(1956~ ), 「마부」 전문

지친 저녁 귀가에는
어느 새 어둠이 따라와 걸었다.
눈덮인 길을 미끄러지며
고삐에 매달려
끌려가던 희뿌연 달빛
주인의 기침 소리를
조랑말의 눈동자는 바람에 놓치지 않으려고
그저 애를 쓸 뿐인데
자꾸 바람은 살얼음을 비집고 들어와
뼈속 깊이 묻히려 한다.
신작로 미루나무 사이로
밤안개를 가르며 날던
기러기들의 원무(圓舞)
너희들의 가냘픈 곡선만큼
휘어진 나의 척추는
조랑말의 등위에서 휘어져 날고 있다.
이제 홰나무 재를 넘으면
토담집 불빛이 막내놈 웃음처럼
새어나올때
숨죽였던 방울소리 다시 들리고
주머니속 동전몇닢은 은화로 살아나고
햇빛을 많이 받는 사람에게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
햇빛이 있는 가난이라고
바람은 살에서 빠져나와 바람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 시를 읽으면 습작 시절이 생각난다. 가난하고 마음까지 추워 조금씩 등이 굽어져 있던 때였다. 그것이 굳어져서 여름에도 잘 펴지지 않던 때였다. 겨울밤 추위와 배고픔과 노동에 지친 조랑말의 휘어진 등과 삶의 무게에 눌려 휘어진 마부의 고단한 척추가, 춤추는 기러기들의 유연하고 가냘픈 곡선과 비유될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답고 통쾌하다.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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