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허남진 칼럼

‘생각의 패션’부터 젊게 바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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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간밤 전국에서 울려 퍼진 응원의 함성이 귀에 쟁쟁하다. 비록 게임에서 지긴 했지만 우리 선수들 열심히 잘 싸웠다. 불과 10여 일 전 국민들을 갈가리 찢어놨던 선거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온 국민을 한마음으로 묶어내는 저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우리 정치도 축구처럼 온 국민이 서로 어깨동무하도록 해줄 수는 없을까.

선거 이후 소통(疏通), 특히 젊은이들과의 소통이 화두(話頭)로 떠올랐다. 이명박(MB) 대통령이 선거에 나타난 국민의 소리를 귀담아듣겠다면서 젊은 세대와의 소통 강화를 들고 나와 불을 지폈다. 집권 여당에 등 돌린 20~30대의 표심을 들여다보면 그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구체적인 방책은 마련돼 있는 걸까.

대통령이 선거 패배의 원인 중 하나로 젊은 층의 등돌림 현상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일리 있어 보인다. 문제는 등 돌린 이유까지 정확히 꿰고 있느냐다.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곤 MB의 소통 부재, 천안함 역풍, 여당의 공천 잘못, 트위터 등이 다양하게 거론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젊은 층을 가장 자극한 건 과도한 북풍으로 형성된 ‘전쟁 동원 공포감’으로 진단되고 있다. 꽤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전쟁 공포감만으로 젊은 세대의 표심을 모두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안함 사태를 보는 젊은이들의 시선 속엔 분명 그들만의 응축된 인식과 정서가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천안함 사태의 어느 지점에서 젊은 시선이 정부·여당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느냐 하는 점이다. 지금도 인터넷에선 ‘천안함 자작극설’이 나돌고 있고, 많은 젊은이들이 솔깃해 하고 있다. 인터넷의 괴담들을 열심히 퍼 나르고, 그걸 다시 확대 재생산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기성세대가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른 것일까.

젊은 층의 불신감은 이미 천안함 사태 이전부터 팽배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제동 논란, 영진공 물의, 한명숙 수사, 스폰서 검사 등을 지켜보며 젊은 세대들은 현 정권에서 과거 권위주의의 냄새를 맡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권력이 언론과 문화예술계, 검찰 수사에 이르기까지 모종의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의심의 소지를 남긴 건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좌파의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그러면서도 집요한 홍보전략은 MB정부에 ‘토목’ ‘삽질’이란 마초적 이미지를 덧씌우는 데 성공했다. 인터넷 시대를 살며 발랄하고 자유분방한 감각에 젖어 있는 젊은이들 눈엔 MB정부가 행동의 패션에서도, 사고의 패션에서도 1970~80년대의 낡은 틀에 갇혀 있다고 비치는 것이다. 그런 인식으로 천안함을 바라보니 온전하게 보일 리 없다. 오히려 꼰대들이 북풍을 선거에 이용하기 위해 꼰대짓을 한다고 지레 짐작해버린 것이다. 아무리 안보의 중요성을 외쳐도 그들의 코는 퀴퀴한 정략(政略)의 냄새만 맡을 뿐이다.

그동안 MB정부는 젊은 세대에 너무 무관심했다. 무관심보다 위험한 건 배척이다. 광우병 사태의 주역이라며 젊은 세대를 윽박지르기만 한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MB정부 사람들에게선 “너는 틀렸고 나만 옳다”는 자기애적 인격장애나, 친한 사람이 아니면 꺼리는 회피형 인격장애의 증상이 보인다는 지적도 나왔다. 촌스러운 패션에다 폐쇄적 증상까지 보이니 젊은이들로부터 왕따당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방치하는 건 비단 MB정부뿐 아니라 이 나라의 기본가치인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바람직스럽지 않다.

젊은 세대의 마음을 얻으려면 폐쇄적 인격장애부터 치유하고, 패션 또한 젊은 감각에 맞춰야 한다. 스타일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사고의 패션이 시대의 흐름에 맞게 젊어져야 한다. 군부독재식 돌격명령이나 권력을 활용한 공작정치의 유혹은 없었는지도 되돌아봐야 한다. 인터넷 세대는 입맛이 매우 까다롭고 글로벌 안목도 높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전교조식 교육도 접했다. 결코 만만치 않다. 공(公)으로 포장한 사(私)나, 정(正)을 앞세운 사(詐)를 간별해내는 후각 또한 뛰어나다.

젊은이들이 요구하는 신세대 패션의 기본은 현대 감각에 맞는 세련된 민주주의다. 대화와 타협으로 만들어가는 품격 있는 정치, 탄탄한 논리와 진정 어린 설득, 패배에 승복하고 양보할 줄 아는 품격, 거기에 시대를 열어가는 창조적 아이디어라면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걸그룹’들의 패션에 견줄 만하다. 젊은 세대와의 소통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생각의 패션부터 젊게 바꿔야 한다.

정말 실소(失笑)케 하는 건 한나라당이다. MB가 젊은 세대와의 소통을 강조하며 한나라당에 젊은 정당으로의 변신을 요구하자 젊은 의원들이 신이 났다. 너도나도 세대교체의 주인공이 되겠단다. 그러나 나이가 문제인가. 생각이 구닥다리면 나이가 아무리 젊어도 꼰대일 뿐이다.

허남진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