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는 신맛을 좋아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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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7면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맛은 신맛, 쓴맛, 단맛, 매운맛, 짠맛등으로 나뉘는데 이를 오미(五味)라고 한다. 한의학에서 오미는 오장(五臟)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는데 신맛과 간장, 쓴맛과 심장, 단맛과 지라, 매운맛과 폐, 짠맛과 콩팥은 각각 특별한 친화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다섯가지 맛을 느끼는 혀의 부위도 각각 다르다. 단맛은 혀끝,신맛은 혀의 양측면, 쓴맛은 목구멍 가까이의 맨 뒷쪽, 짠맛은 한복판에서 감지된다. 아이들은 혀끝으로 아이스크림을 음미하고, 연인들은 역시 혀끝으로 이성의 달콤함을 찾는다. 중국 무술영화의 검객이 결투직전 고량주를 마실때 고개를 뒤로 탁 꺾는것은, 관객들을 긴장속으로 몰고가기 위한 제스쳐이기도 하지만, 실은 혀의 쓴맛감지 부위를 술이 재빨리 통과케 하려는 동작임에 다름아니다.

한번 길들여진 입맛은 좀처럼 바뀌지 않기 때문에, 술 제조업체에게 독특한 맛의 선점(先占)은 절대절명의 과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전부터 쓴맛과 신맛의 술은 식욕을 돋구는 반주(飯酒)용으로, 단맛의 술은 취하기 위한 용도로 양분(分)돼 개발돼 왔다. 딱딱한 빵이 주식(主食)인 독일의 경우 맥주맛이 대체로 쓰다. 애초부터 보리를 주 원료로 반주용으로 개발됐기 때문이다. 반면 춤추기 위해(?) 맥주를 마시는 미국의 경우 한결같이 달착지근하다.남아도는 쌀을 원료로 듬뿍 첨가한 탓이기도 하다.

포도주의 경우도 마찬가지.적(赤)포도주와 백(白)포도주의 차이는 포도 종류에 따른것이 아니라, 껍질째 담갔느냐 알맹이만 따로 모아서 담갔느냐로 구분된다. 껍질째 담근 적포도주는 껍질속의 떫은 맛을 내는 탄닌성분이 산도(酸度)를 높여 시기 때문에 당초 반주용으로 개발된 술이다. 반대로 알맹이만 가지고 담근 백포도주는 달착지근해 파티용으로 제격이다.

신맛을 강화시켜 성공을 거둔 국산술로는 백화양조의 청하와 보해양조의 매취순이 대표적. 종전의 청주 과실주보다 산도를 높여 여유계층들이 즐겨찾는 일식집에서 반주용 술로 자리를 굳혔다. 진로소주는 단맛 하나로 갑자기 일어선 케이스.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소주=쓴술'로 술마실 때마다 애주가들의 인상이 찌푸려졌으나 진로가, 지금은 사용치 않는 소위 사카린을 첨가, 단맛으로 변신하면서 일거에 시장을 석권했다.

맥주의 경우는 십여년전 하이트맥주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단맛과 쓴맛이 공존해 왔다. OB맥주가 미국식, 크라운이 독일식을 따랐던 것. 그러나 이같은 양분체제는 이미 붕괴되고, 혀의 오미 뿐 아니라 코(香)가 보태진 무제한 경쟁으로 치닫고 있다. 올핸 과연 어떤 술들이 뽐내는 자리에 오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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