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걸음치는 무기구매 실명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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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방부는 오는 28일 첫번째 '확대획득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국방부 차관을 의장으로 획득실장 등 국방부의 핵심 당국자가 참석할 이 회의에서는 그동안 국민 사이에 논란과 의혹을 증폭시켜온 차세대 전투기(FX)사업의 최적 기종을 결정키로 돼있다.

국방부가 확대획득회의를 열 수 있게 된 것은 지난해 12월 무기 구매절차에 관한 규정인 '국방부 획득규정'을 개정해 이 회의를 신설했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이처럼 구매할 무기의 도입방법과 기종 등을 결정할 수 있는 국방부 내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확대획득회의를 만들면서 언론에 일언반구의 설명도 하지 않았다.

이 회의는 참석자들의 투표를 통해 구매할 무기의 기종 등을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현 정부의 국방 개혁에서 대표적 성과로 평가되는 '무기구매실명제'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방식으로, 무기구매 결정에 대한 책임소재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FX기종 결정을 목전에 둔 시점에 이런 회의를 신설, 누구도 이 사업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방부가 현 정부 출범 초기 '무기구매실명제'를 도입하기 전까지 국방 무기체계 획득규정은 국방차관을 비롯한 국방부 수뇌가 모여 구매할 무기의 기종을 투표 또는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이번에 새로 마련한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국방부가 무기구매실명제를 도입한 배경은 '책임질 사람이 책임을 지라'는 취지에서다.

1996년 말 이양호(李養鎬)전 국방장관의 수뢰사건 등에서 보듯 무기구매와 관련된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국익에 큰 손실을 입혔음이 드러나도 책임질 당국자가 아무도 없다는 점이 무기구매실명제를 도입한 가장 큰 이유가 됐다.

따라서 그 당시 국방부가 새로 만든 무기구매실명제는 국방부 획득실장이 책임지고 구매할 기종을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했었다.

국방부 주변에서는 이번 FX사업의 결정과 관련한 비방과 투서가 난무하고 있어 앞으로 청문회가 열릴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많다.

FX 기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국방부가 응찰 기종에 대한 성능 및 협상 내용을 모두 파악한 뒤 기종 결정방법과 분야별 중요도를 결정한 것도 국방부가 특정 기종을 밀고 있다는 의심을 낳고 있다. 이런 마당에 국방부가 '확대획득회의'를 열어 FX 기종을 결정한다는 것은 4조원을 들여 도입할 FX사업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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