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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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보수적인 경영으로 소문난 은행의 풍속이 바뀌고 있다. 정규직원의 업무를 줄이고 아웃소싱을 늘리면서 참신한 아이디어를 다양한 방법으로 쥐어짜고 있다. 업무에 대한 평가와 보상을 계약서로 만들고 과감한 성과급을 지급하는 은행도 늘고 있다. 임원부터 행장까지 세대교체 바람이 부는 것도 이같은 기류의 일환이라는 시각도 있다.

◇은행에는 핵심인력만=하나은행은 은행권 최초로 특정 업무를 떼어내 직원이 만든 외부업체에 맡기는 소사장제를 도입한다고 25일 밝혔다. '본점에는 핵심인력만 남기고 나머지는 분사(分社)시켜 네트워킹을 강화한다'는 김승유 행장의 전략에 따른 것이다.

채권추심 업무를 맡게 될 1호 소사장으로는 주영우 전 여신관리부장과 나홍구 전 홍대입구 지점장이 선발됐다. 이들이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6개월간 은행에서 인적·물적 자원을 지원한다. 전략기획팀 김경중 차장은 "은행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을 하면서 외부업체에 맡길 때보다 긴밀한 업무협조를 기대할 수 있는 윈-윈 게임"이라고 설명했다.

직원들의 반응도 좋은 편.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이 이미 사라져 기회만 있으면 독립하려는 사람이 많은 데다 소사장제가 자리잡을 때까지 은행의 지원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1호 소사장의 경쟁률은 5대1을 넘었다고 은행측은 설명했다. 현재 국민관광상품권 판매를 담당할 2호 소사장을 공모 중이다.

◇막힌 언로를 튼다=조흥은행의 지방 각 지점에서 선발된 21명은 지난 주말 2박3일간 무주리조트에 모였다. 지난해 9월 도입한 이른바 타운미팅의 일환이다. 본점과 지점 직원들이 3개팀(팀당 7명)을 만들어 2박3일간 숙식을 함께 하며 새로운 상품 및 서비스를 찾는 아이디어 회의다. 조흥은행 기획부 조성호 팀장은 "그동안 세차례 회의에서 나온 아이디어 중 28건이 올해 경영계획에 포함됐다"며 "의사소통이 원활해지는 효과도 있어 앞으로 확대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국민은행은 다른 부서의 업무협조 문서에 대해 24시간 이내에 답변하지 않으면 승인한 것으로 간주하는 '일몰제'를 실시 중이다. 합병으로 인한 업무장벽을 허문다는 취지에서 시작했는데 모든 부서간 협의가 하루 안에 끝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내부 공문을 보내고도 답을 얻기 위해 전화통을 붙잡고 씨름하는 모습이 사라졌다"고 평가했다.

◇확산되는 성과 관리=임원이 성과 목표를 정해 행장과 계약서(MOU)를 체결하는 것은 이제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MOU에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자리를 내놓겠다는 단서조항이 포함돼 있다. 은행 임원은 '임시 직원'의 준말이라는 표현이 나돌 정도다. 한빛·외환 등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에서 시작된 임원 MOU는 다른 은행에도 파급돼 산업·수출입은행에도 이미 도입됐다.

산업은행은 일반 행원에 대해서도 '성과 마일리지'를 지난해 말 도입했다. 좋은 아이디어를 내거나 영업실적이 좋을 때마다 점수를 주고 쌓인 점수를 상금·휴가와 맞바꾸는 제도다. 점수가 많이 쌓이면 최고 3천만원의 포상금과 15일간의 특별휴가를 받게 된다.

◇연령·성별 파괴=은행마다 발탁 인사가 성행하고 있다. 하영구 한미은행장에 이어 조흥은행의 홍석주 행장 후보가 두번째 40대 행장이 된다.

이런 판국에 40대 임원 밑에서 50대 부장이나 지점장이 일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한미은행의 한 간부는 "행장과 임원이 젊어지면 그 나이 또래의 발언권이 세지고 자연스럽게 은행도 젊어진다"고 말했다. 여성들의 약진도 돋보인다. 서울은행 김명옥 부행장이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올해 부행장이 됐다. 국민은행은 지난 인사에서 31명의 여성 지점장을 발탁했으며 핵심 지점으로 꼽히는 명동지점장에 30대 대리급인 윤설희(38)씨를 임명했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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