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진혁 칼럼

누가 흥하고 누가 망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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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역대정권에서 흥한 정치인은 누구였고, 망한 정치인은 누구였던가, 어떤 인간형(型)이 흥했고, 어떤 인간형이 망했는가. 그들 간의 공통점이 있을까 없을까.

필자가 40년 가깝게 신문기자로서 나름대로 정치를 관찰해온 결론은 이렇다. 한국 정치에서는 이른바 온건파가 오래 살아남고 강경파가 빨리 몰락하더라는 것이다. 또 독하고 모진 자, 과잉 충성자, 국민의 미움과 경멸을 받는 자는 빨리 몰락하고 종말이 비참하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심을 잘 살피고 타협에 능숙한 정치인은 오래 살아남고, 민심을 무시하면서 강성(强性)으로 밀어붙이는 정치인들은 빨리 몰락한다는 사실이다.

*** 타협적인 온건파가 오래 남아

정치인의 흥망을 단순히 강.온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자유당 시대를 봐도 온건파로 불리던 이재학(李在鶴), 김성곤(金成坤), 김진만(金振晩) 이런 인사들은 오래 살아남았다. 반면 강경파로 분류되던 사람들은 비극적으로 죽거나 자유당 멸망과 함께 정계에서 사라졌다. 박정희 시대에서도 강경파라 할 김형욱(金炯旭), 차지철(車智澈) 이런 사람들의 종말은 비참했다. 그러나 온건파 중에서는 오래 살아남은 사람이 많고 정권이 몇번 바뀐 후에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全.盧 때나 YS.DJ 때도 어떤 사람들이 감옥을 들락거렸는지, 누가 그 후에도 살아남고 이름을 높였는지를 살펴보면 역시 강경파는 빨리 사라졌고 온건파는 다수 살아남았음을 알 수 있다. 비판자들을 향해 길길이 뛰던 소위 실력자들, 신문사 세무사찰을 하고, 협박을 일삼던 사람들…. 지금도 눈에 선한 그런 사람들이 지금은 다 사라졌다.

어느 정권이든 민심보다는 정권이익을 앞세워 강하게 밀어붙이는 강경파는 존재한다. 그들은 처음엔 득세하고 권력을 휘두르지만 민심은 차차 그들을 떠나고, 미워하고 경멸하고… 결국은 망한다. 외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강경파였던 마오쩌둥(毛澤東)보다는 온건파인 덩샤오핑(鄧小平)이 더 오래 살아 남았고, 국민의 존경도 더 받고 있다. 프랑스혁명의 최고 강경파였던 로베스피에르도 비참한 종말을 맞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요즘 우리 정치는 어떤가. 요즘에는 민심을 무시하고 타협을 배척하는 강경파가 없는가. 국민이 바라는 일보다 정권이익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세력, 그래서 국민의 미움과 경멸을 받는 정치인은 없는가. 결코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즘도 여야 타협은 보기 힘들고 심각한 민심이반이 늘 걱정되고 있다. 민심이라고 전해지는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보면 가슴이 철렁할 지경이다. "국회의원 하고는 악수하지 않겠다"

"정치인이라면 패주고 싶다" "대통령은 좀 수입할 수 없습니까". 이런 시정의 말이 보도되었다. "택시 타고 청와대 가자고 하기가 겁난다"는 말도 있다. 민심을 못 얻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정치는 이미 위기라고 할 수 있다.

과거나 지금이나 국민이 정치인에게 그리 큰 기대를 거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정치인들에게 성인군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요. 하루아침에 잘살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상식선(線)을 바란다고 본다. 정치인들이 상식에 맞게 말하고, 처신하고 정치를 해준다면 국민은 별말이 없을 것이다. 해먹더라도 너무 도(度)를 넘지 않게 해먹고, 싸우더라도 어느 정도 싸운다면 체념하고 넘어가 주는 게 민심이 아닌가 한다.

*** 가슴에 손 얹고 자문해보라

그러나 문제는 지금도 정치가 그런 상식의 수준에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식보다 더 저질이 판치고 보통 사람도 잘 쓰지 않는 막말이 고위층에서부터 자주 나온다. 무엇보다 민심이 외면되고 있다. 국민이 거의 만장일치로 경제우선.민생우선을 바라고 있지만 정치 초점은 늘 다른 데 가 있다. 힘의 정치도 끊임없이 시도된다. 지금 정권지지율이 형편없이 낮고 민심이 흉흉하다는 사실 자체가 상식의 정치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정치인들은 자기가 오래 살기 위해서라도 손을 가슴에 얹고 물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내가 혹 강경파가 아닌가" "내가 지금 국민의 미움을 받고 있지나 않은가" 하고 수시로 자문자답(自問自答)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시절 국민이 어떤 인간을 미워하고, 어떤 인간형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가끔씩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니까 망하지 않으려면 강경파가 되지 마라, 민심을 존중하고 상식의 정치를 하라는 것이 필자의 끝맺음이다.

송진혁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