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력·긴박감 넘치는 생방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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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그녀의 웃음소리'. 노래 제목이 아니다. 얼마 전 생방송 연예 프로그램을 시청하던 사람들은 자료 화면이 나가는 도중 난데없는 여성의 웃음소리에 놀랐을 것이다. 마이크가 꺼진 줄 안 진행자가 다른 진행자의 멘트를 듣고 그만 웃음보가 터진 것이다. 이렇듯 생방송엔 늘 사고의 위험이 있다.

뉴스나 스포츠 중계를 제외한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녹화 방송'이다. 녹화 중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면 NG(No Good의 준말)를 내고 "한번 더!"를 외치면 된다. 아니면 '편집' 과정에서 거르면 만사 오케이다. 반면 생방송 중 NG는 곧 '사고'이기 때문에 다들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생방송엔 장점이 있다. 모두가 긴장하는 가운데 리얼리티(생동감)가 팍팍 살고, 그래서 다들 생방송에 눈길을 주게 마련이다. 생맥주·생크림·생고기·생수·생물생선·생중계…. '살아있는' 또는 '가공하지 않은'을 의미하는 '생(生)'자 하나에 감칠 맛이 더해지고 생명력이 느껴진다. 생방송 또한 마찬가지다. 생방송 가요 프로를 부득이한 사정으로 녹화 방송한 경우 출연진의 면면이 좋더라도 시청률이 떨어진다는 자료가 있다.

우리나라 방송 초창기 시절엔 드라마도 생방송으로 전파를 탔는데 광고까지도 드라마 사이에 생으로 끼어들어 긴박감은 '호떡집에 불 난 것'보다 더 했다. 이런 생방송의 '긴급함'은 영화에서도 극적 장치나 모티브로 차용됐다. 1997년 일본 아카데미상 12개 부문을 석권한 '웰컴 미스터 맥도널드'는 라디오 드라마 생방송을 다룬 코미디 영화의 수작이다. 몰래 카메라가 거대한 세트를 이룬 '트루먼 쇼'도 트루먼의 일상을 생방송했고, '매그놀리아'에서도 생방송은 퀴즈 쇼의 형식을 통해 긴박감을 극대화했다.

생방송엔 또 다른 특징도 있다. 우선 출연자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해서 엉뚱한 재미가 있고, 방송 종료시간을 지키기가 쉽지 않아 허둥되는 맛이 있어 인간답고….

대본을 빠뜨리고 생방송에 들어가 김정민을 김민종이라고 제멋대로 작명한 리포터, 뉴스 중 누적된 과로로 코피를 흘린 진행자, 도청 소재지를 도청 쏘세지로 내뱉은 아나운서 등 생방송 일화는 두고두고 안주거리다. 특히 생방송 중 노래를 부르던 삐삐롱 스타킹이 카메라에 침을 뱉었을 때 하늘이 까맣다가 노랗던 기억은 지금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생방송은 공포이기도 하다. 첫 생방송을 앞둔 PD들은 대개 청심환을 먹거나 줄담배를 태우면서 불안감을 줄이려 하고, 장이 예민한 출연자는 정로환 수십알을 복용한 뒤 생방송에 임한다. 생방송 직전 화장실에 혼자 앉아 기도를 하거나 계속 수다를 떨면서 긴장감을 달래는 경우도 있다.

삶은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는 '생방송'이다. 따라서 NG를 내고 "다시 한 번"을 외칠 수 없다. 그래서 현재가 중요하다. 라틴어로 '카피 다이엠'(Carpe diem). 오늘을 잡자.

MBC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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